"누구든지 나와 내 말을 부끄럽게 여기면". 그날의 말씀 카드였다. 미사 전 성수에 손가락을 담그고 빠르게 성호를 긋는다. 미사 전 최소한의 예절이자 일주일 동안 세속에서 선하게 지내지 못한 반성과 회개하는 순간이기도 하다. 찰나의 시간 용서를 빌고 마음의 준비를 해야 한다. 하지만 종종 습관처럼 성수 위에 적힌 기도문도 제대로 읽지 않고 서둘렀다. 무의식적으로 성호를 근 적도 많았다. 그렇게 생각 없이 본당에 들어가는 때가 얼마나 많았던가.
주임신부님이나 보좌신부님(작은 신부님이라고도 칭한다)은 독서가 끝나고 강론을 시작하실 때 인사말처럼 이 말씀 카드를 함께 읽자고 제안하신다. 그날의 가장 중요한 말씀을 복음에서 뽑아 그 문구만큼은 기억하자라는 취지에서 하는 의례이다. 마침 나와 안드레아는 평소와 달리 4시 미사에 참여했고 본당 신부님이 아닌 손님 신부님께서 미사를 집전하셨다.
강론 시간, 신부님은 해마다 이때쯤 기리는 희생 성인에 대해 말씀하셨다.
"우리는 더 선조들처럼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박해를 받거나 도망 다니는 삶을 살지는 않습니다. 그분들의 신앙과 용기, 희생 덕분이지요. 목숨을 담보로 불안하게 살 필요도 없습니다. 하지만 생각해 보십시오. 지금은 그때처럼 그리스도인이 비 그리스도인에게 상처를 받는 경우는 별로 없습니다. 대한민국에서는 말이죠. 신앙을 지키기 위해 교우촌에 숨을 필요도 없지요. 오히려 그리스도인과 그리스도인 사이에서의 핍박이나 상처가 더 많을지도 모릅니다. 형제가 형제에게 하는 것처럼요"
세례를 받았다고 우리는 완전히 깨끗하고 성스러운 신앙인이 되는 건 아니다. 죄를 지어도 되는 면죄부를 받는 것은 더욱 아니다. 여전히 우리는 세상의 유혹에 둘러싸여 끊임없이 시험을 받고 있다. 서로 불편한 이야기일 수 있다는 이유를 핑계 삼아 종교 이야기를 피하기도 한다. 신부님은 바로 이런 점을 현대의 신앙인이 짓는 죄일 수 있다고 말씀하신 것이다. 들은 대로 실천하지 않고 서로에게, 특히 신자들 사이에, 조금 파가 다르다고 해서 서로 배척하고 미워하는 행위를 꼬집으신 것이기도 하다.
더 나아가 우리는 가까운 사이임에도 더 편하게, 더 거칠게, 더 무례하게 대하며 상처 주는 일이 있다. 가족, 친구, 지인 사이에서 더 큰 상처와 갈등으로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을 늘 조심해야 하거늘 우리는 늘 실수하고 죄를 짓는다. 복음대로 살지 않는 것, 유혹에 굴복하고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 선행은 무슨 시대에 뒤떨어진 생각이냐며 호구되지나 말라고 비웃는 것, 모두 우리가 스스로에게 행하는 박해다. 남들 다 그렇게 사는데 혼자만 고귀하게 살면 바보라고 칭하기도 한다. 과연 그런가. 그래서 의인은 예나 지금이나 드물다. 예수님에게도 그분을 오해하거나 질투하고, 비난을 일삼는 적들이 있었다.
종교가 다르거나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편하게 대하려고 노력한다. 때로는 상대가 거부감을 보이거나 불편함을 표현할 때면 차라리 그 자리를 피하려고도 했다. 마음은 불편했다. 부딪치기도 싫지만 그렇다고 막상 피하면 신앙인으로서 복음을 전파하기는커녕 괜히 비겁하고 소심한 사람이 된 기분도 들었다. 최소한 내가 신앙인인 사실을 숨기거나 부끄러워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세례를 받았어도 나는 완벽하지 않고 여전히 죄를 지을 수 있는 약한 자가 될 수 있다. 그래도 도망쳐서는 안 된다. 나는 왜 자꾸 죄를 지을까 자포자기하며 막살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한다. 나만의 아픔과 상처와 십자가가 사라지지는 않아도 어제보다 나은 오늘, 내일을 희망하며 선한 사마리아인처럼 되길 꿈꾼다. 혹여 본의 아니게 상처를 주더라도 바로 달려가 화해를 할 용기를 낼 수 있지 않을까.
신앙은 부끄러운 게 아니다. 다만 타인은 물론 나 자신을 함부로 대하고 유혹에 한없이 빠져드는 나 자신은 부끄러워해야 한다. 내가 나를 박해하지 않아야 진정 나를 사랑할 수 있고 타인을 아프지 않게 할 수 있다. 스스로 좋은 음식을 먹는 것, 좋은 말을 듣게 하는 것, 좋은 사람을 만나고 좋은 일을 하는 것은 내 몸, 내 정신을 위하는 자양분이 될 것이다. 나를 존중하고 더 나아가 타인을, 세상을 행복하게 하는 것임을 기억하며 오늘도 나는 성호를 긋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