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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우정(WHITE FANG)

by 애니마리아


화이트 개과 늑대의 피, 둘 다 흐른다. 야생에서 태어났지만 인간을 따르는 모견을 따라 인간 세상에 성장했다. 인간과 개는 화이트 팽을 철저히 늑대 취급한다. 그의 리더십과 강인함을 이용하되 정을 주지 않았다. 보상과 먹이, 쉴 곳을 제공하되 그와 교감하지 않았다. 인디언 그레이 비버도, 이름이 아름다운 뷰티 스미스도.



반항은 곧 학대에 가까운 매질을 의미했고 복종, 보상 사이에 인간의 규칙을 따르기만 했던 화이트 팽에게 위든의 접근은 혼란스럽기만 했을 것이다. 하지만 위든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의 노력은 헛되지 않았다. 화이트 팽이 위든의 손길을 받아들인 것이다. 여전히 으르렁거리지만 기분 좋은 으르렁거림이요, 남아있는 늑대의 본능이다. 공격의 으르렁이 아니라 수용의 목소리다. 결국 화이트 팽은 새 주인, 위든의 방식을 이해하고 받아들였다. 위든의 친구 매트Matt는 먹이를 주었지만 화이트 팽은 오로지 위든에게만 헌신했다.



어느 날 위든이 일이 생겨 며칠 집을 비웠다. 친구 매트가 화이트 팽이 있었음에도 화이트 팽은 먹기를 거부한다. 며칠이 지나도록 작은 오두막집의 현관 문이 열리기를 기대하면서 자리를 지키고 있다. 드디어 위든이 돌아왔고 화이트 팽은 움직였다. 그만의 방식으로 주인을 맞이하는 모습이 인상적이다.



맙소사! 화이트 팽이 꼬리 흔드는 것 좀 보게!

By George! Look at him wag his tail.

p. 113/WHITE FANG



처음에 이 말의 의미를 바로 파악하지 못했다. '개가 주인을 보면 꼬리 흔드는 건 당연한 일 아닌가. 그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라고 터프한 화이트 팽을 칭찬하며 감탄하는 걸까?' 하고 말이다. 잘 나가던 화면이 멈추고 버퍼링이 온 것 같은 기분이 들어 전후 문장을 다시 읽어 보았다. 직접적인 이유가 드러나지는 않았지만 두 가지 사실을 알았다. 우선 화이트 팽은 늑대의 피가 흐르는 개이기보다는 개의 피가 살짝 섞인 늑대라는 것. 두 번째로 늑대는 개만큼 꼬리를 많이, 자주 흔들지 않는다는 사실을. 늑대도 꼬리를 흔들기는 하지만 개처럼 감정과 인간을 대하는 호감, 친밀도, 사랑의 표현이 아니라 복종, 경계, 조심스러운 접근을 위한 제스처였다. 감정의 도구가 아닌 사회적 신호의 표현 수단 가운데 하나라고 한다.



그렇게 화이트 팽은 시나브로 변해갔다. 한때 개들과 철저히 거리를 두고 홀로 고독하게 지냈던 늑대개는 이제 반가움과 애정의 표시로 꼬리를 흔들기 시작했다. 주인에게 다가가며 가까이 서로의 품에 파고드는 법을 배웠다. 인간을 사랑하기 시작한 것이다.(He was learning how to love.p.113)



이러한 변화는 비단 야생동물에게만 일어날 수 있는 건 아니다. 우리나라도 오래전 남자는 책임의 무게를 지고 눈물은 허용되지 않았던 시절이 있었다. 감정 표현이 금기시된 환경에서 자랐다. 울지 못하니 울게 하지 않았다. 따뜻하게 포옹 받지 못하니 포옹할 줄 몰랐다. 가족이나 친구 등 누군가 포옹이나 사랑의 인사를 건네도 그렇게 어색할 수가 없었다. 사랑과 우정, 연대의 감정 표현은 경험해야 다시 표출할 수가 있었을 테니.



개를 접하고 키우며 그들을 자세히 관찰하고, 그들과 교감하지 않았다면 작가 잭 런던도 감성과 야성이 동시에 존재하는 소설을 창작할 수 있었을까. 오늘따라 위든과 화이트 팽의 한 뼘 더 가까워진 우정이 빛나 보인다. 바위처럼 단단한 마음이 녹아 샘물같이 솟아나는 우정이 부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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