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ITY OF NIGHT BIRDS)
파리 발레단에 초빙된 나탈리아. 연인이자 발레 파트너 사샤와 함께 볼쇼이를 떠나 프랑스로 향한 그녀는 최고의 대우와 환대를 받는다. 전용 발레 의상 수선 직원이 생겼고 청소 담당 직원과 자동차 혜택도 받게 되었다. 오로지 춤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과 여유를 받은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제대로 누리는 게 어색한가 보다. 나탈리아가 감지하는 불안이 괜히 남일 같지 않다.
The greatest threat to the creative instinct is comfort. No painter picks up a brush after sumptuous supper, no writer writes anything good while enjoying a high and stable income.
창의적 본성에 가하는 가장 큰 위협은 '안락함'이다. 진수성찬을 대하고 붓을 들 화가는 없으며 고액의 수입을 받으며 좋은 글을 쓸 작가도 없다.
p.199/『 CITY OF NIGHT BIRDS 』
고차원의 예술의 경지, 달인만 내뱉을 것 같은 금언이 아닌가. 멋있어 보이나 이미 정상을 찍고 누릴 게 많은 사람의 불안일 수도 있다. 긴장을 놓지 않으려는 성찰일 수도 있으나 자신을 다그치고 정상을 향해 나아가는 열정과 인내의 동인이 사라졌음에 허망해하는 아쉬움일 수도 있다. 나의 시선이 삐딱할 수도 있지만 당장 생계가 막막하다면, 눈앞에 먹여 살려야 할 가족이 있다면 이 또한 사치스러운 공염불일 수도 있다는 뜻이다. 소설 속에서 이러한 생활을 즐기는 편이 아닌 나탈리아도 파리의 고급 상점에서 한 달 치 월급에 해당하는 가격의 지갑을 구매하게 된다. 누리면서 느끼는 불안, 과연 그래도 되나 하는 양가감정, 예술과 물질의 향유 사이의 갈등을 보여주는 장면이다.
아무리 예술을 탐구하는 예술가라도 최소한의 가난을 즐기며 평생 가난한 예술을 추구할 사람이 있을까. 슬프지만 견디며 할 뿐, 누릴 수 있다면, 팔 수 있다면, 대중의 사랑을 받을 수 있다면 행복할 것이다. 누가 사랑받고 받지 않고는 대중조차 알 수 없기에, 때로는 운명에 맡겨야 하기에 그들은 뚜벅뚜벅 걸어간다. 언젠가 자신을 알아주겠지. 그렇지 못하면 슬퍼하면서 누구보다 묵묵히 나아가는 존재들이다.
이 모든 논란에도 불구하고 고통이 때로는 극복과 성장의 강한 모티브가 될 수 있다는 말에는 동의한다. 굳이 사서 할 필요는 없지만 있어도 꿈을 이루기 위해서, 더 나은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서 거쳐야 하는 시험대와 같으니까. 저 멀리 보이지도 않는 목표로 나아가는 데 거쳐야 할 장애물이 아니라 자신을 다그치는 수단으로 삼는다면 문제는 다르다. 극복해야 할 적과 장애물이 사라지면 더 이상 나아가야 할 의욕을 일을 테니. 일이든, 예술이든, 그 어떤 꿈이든 수단이 아닌 그 자체에 내 모든 것을 쏟아부을 수 있는 영원한 사랑이길 바란다. 그래야 힘들어도 혹은 힘이 빠져도, 허무해도 계속 나아갈 수 있으니까.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수월하게. 그래야 한참 거친 언덕을 힘겹게 올라가다가도 작은 내리막길에서 힘을 빼고 맞이하는 바람을 시원하게 온전히 누릴 수 있을 테니.
그러니 나탈리아. 방탕이나 타인 앞에서 과시가 아닌 자신의 노력에 대한 작은 보상 정도는 괜찮지 않을까. 잠시 적이 눈앞에서 사라졌다고 허탈해하지 말길. 고통과 수고스러움이 덜어졌다고 너무 불안해하지 않길. 우선 감사하고 조금은 누려도 된다. 사실 이런 행복의 순간은 그리 길지 않다. 자주 오지도 않는다. 장애물이 없어서 몰락하는 것만은 아닐 것이다. 시간의 흐름에 따라 자연스러운 노화의 한 과정일 수도 있지 않은가.
꽃은 언젠가 시들고 지기에 더욱 아름다워 보인다. 다만 시들어가는 과정을 느끼고 보는 것만으로도 힘들 수 있다. 특히 최고의 경지에 도달한 사람일수록 더욱 그럴 것이다. 이는 어느새 다가온 '쓸모의 쓸모없음'에 대한 슬픈 노래처럼 들린다. 하지만 어느 철학자의 말처럼 '쓸모없음의 쓸모'로 살아갈 수 있다. 예술도, 인생도 크게 다르지 않다.
여전히 마음이 힘겨운 새벽이다. 가난한 예술가의 마음으로 오늘 하루의 화폭에 그림을 그려나가고 싶다. 소박하게라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