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 계획, 새롭지 않으나

by 애니마리아


(* 수술 전 예약 글)


12월 31일. 나의 유쾌한 화상 영어 선생님, 클레어 선생님(Clare Elaine)과 하는 2025년 마지막 수업 날이었다. 임시 거처의 추위가 워낙 강했고 감기마저 심하게 걸려 목소리가 잘 나오지 않았다. 새해가 얼마 남지 않은 밤 10시에 수업을 하려니 제대로 수업을 할 수 있을지 걱정도 되었다. 목도 마르고 기침을 하면서 몸은 덜덜 떨리는 등 전날의 몸살기가 남아 있었다. 할 수 없이 외투를 입고 수업에 임했다.



클레어 선생님의 장점은 언제나 행복하고 밝은 웃음으로 만나 수업 시간 내내 엄청난 에너지를 발산하신다는 것이다. 단점은 그 에너지가 너무 커서 가끔은 기가 빨리는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물론 농담 반). 그래도 기분 좋은 느낌이다. 아프거나 피곤할 때는 수업을 미루고 싶기도 한데 희한하게도 수업이 시작되면 클레어의 환한 미소와 유쾌한 목소리에 똑같이 반응하는 나를 발견한다.



'안녕, 예쁜이(Hi, Gorgeous)! 잘 지냈어?'



한국인 입장에서 일부는 이런 인사말이 다소 낯설지도 모르겠다. 선생님이 제자에게 하는 인사라는 배경을 감안하면 더욱 그렇다. 문법적으로 틀린 말은 아니나 한국에서는 이런 어휘를 잘 쓰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어권에서는 사심 없이 친근함의 표시로 종종 이렇게 인사한다. 처음에는 나도 조금 놀라긴 했다. '멋진, 예쁜'이라는 단어 자체 때문이 아니다. 영국인은 상대적으로 미국인보다 조금 딱딱하고 정제된 영어만 쓴다고 생각한 나의 편견이 작용한 탓이다.



어쨌든 클레어는 일주일에 한 번 만나지만 늘 일 년에 한 번 만난 친척처럼 반가워서 어쩔 줄을 모른다. 50대라는 나이가 느껴지지 않을 만큼 젊고 활기 있으며 아름다워 보이는 사람이다. 늘 웃고 상대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하다는 인상을 주며 집중하는 대화술은 그녀만의 매력이다. 그녀라고 기분이 안 좋은 날이 왜 없겠는가. 물론 우리 둘은 어느 정도 자본주의가 작용하는 배움과 가르침의 관계다. 그럼에도 나를 존중하며 수업을 즐겁게 이끌어가려는 그녀의 노력에 매번 탄복하게 된다.



클레어의 수업 태도와 말투, 제스처 모든 것을 통해 진정한 프로의 진면목을 체험하기도 했다. 생각해 보니 자연스럽고 알찬 수업이 될 수 있도록 신경 쓰는 클레어의 노력이 많았다. 경계심이나 두려움을 허물어뜨리는 인사법, 그 안에서도 한국어 이름을 정확하게 발음하며 친근감을 유도했다. 한국어 발음을 어려워하는 외국인을 위해 애니(Annie)를 종종 쓰곤 하지만 클레어는 내가 알려준 한국어 이름으로 불러주며 벽을 허문다. 우리도 '~야, ~아'라며 애칭이나 별칭으로 부르지 않나.



클레어는 어떤 화제를 꺼내더라도 대응에 막힘이 없다. 심심할 틈이 없다. 속도도 빨라서 때로는 따라가기 버겁기도 하지만 대신 수업 시간이 유난히 빨리 지나가는 느낌이다. 워낙 말이 많아서 내가 계획한 내용이나 양을 채우지 못하고 끝나는 경우가 많다. 수많은 학생을 대할 텐데도 수업 시간에 이야기한 나의 개인사를 기억하고 다음 수업에 언급을 하거나 질문을 하기도 한다. 아마 수업 전후로 개인별로 학생에 대한 특이 사항이나 수업 내용을 메모하는 것 같다. 노는 듯할 것 다하는 선생님, 진정한 고수다. 할 말이 없었더라도 자연스러운 회화가 이루어지니 뭐라도 배우고 남기는 경험이 된다.



수업 말미에 클레어는 내게 새해 계획(New Year's Resolutions)에 대해 물었다. 나는 새로 도전하는 학교에서 적응하고 커리큘럼을 잘 따라갈 수 있도록 열심히 공부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했다. 그러고 보니 시험 준비 과정을 알고 있던 클레어는 늘 시험 일정과 준비, 결과 등을 물어보며 나의 긴장을 풀어주었다. 시간만 때우며 임기응변으로 대하는 원어민 선생님과는 달리 참 따뜻한 분이다. 게다가 유머 감각도 풍부해서 우울하고 힘든 기분을 나아지게 하는 마법의 힘도 지니신 분이라고 생각한다.



그동안 새해 계획을 세울 때면 늘 새로운 목록을 잔뜩 포함했다. 이것저것 쓰다 보면 계획보다는 버킷리스트 같았다. 매년 바뀌는 버킷리스트. 하지만 2026년에는 새로운 목록을 많이 집어넣지 않으려 한다. 오히려 똑같다. 단, 새로운 학교에 가는 일만 제외하고. 나의 꿈을 위해 열심히 공부하기, 공부든 일이든 바탕이 돼야 하는 건강 챙기기, 운동하기, 불편한 상대를 만나도 너무 미워하지 않고 조금만 더 너그러워지기. 이는 단 하루, 한 달, 한 해만 해당하는 단기 프로젝트가 아니기 때문이다.



순간에 감사하고 실패하고 넘어져도 희망을 갖고 나아지려는 노력은 앞으로 남은 생애 새해를 맞이할 때마다 다시 다짐하며 지켜나가야 할 덕목이다. 새해지만 새롭지 않은 계획, 흐트러지지 않게 유지하는 것만으로도 쉽지 않다.



김상욱 교수님이 말했다. 올해도 AI의 광풍으로 인간은 아무리 미래를 예측하고 대비하려 해도 생각하지 못한 일을 겪을 것이라고. 미지의 세계로 흘러가는 가운데 불안을 느끼는 인간은 너도나도 변화를 감지하고 변화하려고 노력하자고 외친다. 오히려 그럴수록 무엇이 변하지 않는가에 집중하며 기본에 충실하자고 역설하셨다. 일리가 있는 말이다. 변하지 말자고 하는 뜻이 아니라 변화에 휘둘리지만 말고 중심을 잡자는 말로 들렸다. 소극적으로 대처가 아니라 부화뇌동하지 않도록 조심하자는 의미로 해석했다.



아무리 슈퍼컴퓨터로 예측을 해도 허리케인이나 폭풍을 다 잡아낼 수 있는가. 피해 없이 완벽한 대처가 가능한가. 준비를 하더라고 인명피해가 전혀 없을 수 있을까. 위대한 발명을 해 낸 사람들이 그 부작용까지 완벽히 예측하지는 못했다. 광물을 효율적으로 캐낼 다이너마이트를 만들면서 그것이 전쟁에 쓰일 거라 알지 못했을 것이다. 편리한 플라스틱을 만들면서 몇십 년 후, 바다와 자연이 플라스틱 쓰레기로 오염되고 생명이 죽어가는 것을 예상하지 못했을 테다. 올해도 또 얼마나 많은 사건, 사고가 일어나겠는가. 때로는 좋은 일이 때로는 슬픈 일이. 개인적으로는 또 얼마나 내가 원하지 않는 감정에 휩싸이겠는가. 아무리 조심하고 노력해도 갈등이 생길 수도 있다.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그럴수록 중심을 잡고 싶다. 과거보다 좀 더 현명해진 나로서 대처하고 싶다. 덜 삐지고 싶고 더 성숙하게 살고 싶다. 기본에 충실한 꿋꿋함으로, 꾸준한 노력으로.












매거진의 이전글불의의 사고, 일 년 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