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사. 내게 낯선 개념은 아니다. 필사를 처음 해보는 것도 아니다. 원서 읽기와 영어 실력 향상을 위해 기간을 세우고 필사를 하기도 했다. 때로는 '번역 공부'의 일환으로 온라인 프로그램에 등록하고 정해진 기간에 매일 쓰기도 했다. 100일 쓰기 프로젝트의 일환이어서 책 한 권을 정해 매일 뭔가를 썼다. 약속된 기간이 종료되었음에도 괜히 오기가 생겨 부분 필사가 아닌 한 권을 다 필사하겠다는 마음이 생겼다. 반강제적 필사에서 자율적 필사로 이어졌다. 하지만 수개월에 걸쳐 필사를 마친 후의 기분은 의외로 뿌듯함보다는 허망함이 더 컸다. 어느 순간부터 기계적으로 베끼기만 한 날이 부지기수였기 때문이다. 노트로 몇 권이 나와 가시적인 기록물로 남은 자부심은 생겼다. 아까워서 필사 노트를 몇 년 보관하다가 결국 먼지 쌓인 책들과 함께 버린 기억이 있다.
지금도 쓰다 만 필사 서적이나 노트가 꽤 있다. 온라인 서점을 쇼핑하다가, 누군가 권해서, 순수하게 읽다가 필사하면 좋겠다는 마음이 들어서 끄적이는 스타일이다. 소설이나 에세이를 필사하기도 하고, 국내 신문 오피니언, 사설 및 영자 신문을 발췌해서 부분 필사를 하기도 했다. 작년에는 성경 필사를 한다고 두 권이나 사서 신약 및 자녀에게 하는 기도 필사 책을 구입하기도 했다. 필사를 주제로 한 책들은 대부분 작가의 신중한 연구와 조사를 바탕으로 엮여서 내용이 대부분 좋다. 꾸준히 따라 쓰기만 해도 지혜와 배움의 기쁨이 솟아날 때도 있었다.
이 책을 읽기 전까지는 필사는 '단순히 베껴 쓰기' 내지는 '손으로 쓰는 명상'이라는 개념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그런 의미에서 책 제목은 읽기도 전에 흥미를 끌어내며 어떤 내용으로 펼쳐질까 기대를 하게 만들었다.
'필사적 글쓰기 수업'. 필사적은 한자에 따라서 쓰임새가 다르기 때문이다. 동음이의어를 이용한 제목이 재미는 물론 이 책의 존재 이유를 효과적으로 설명한다고 생각한다. 기발한 언어유희가 주는 재치 있는 인사다.
제목은 중요하다. 첫인상을 결정하는 얼굴이자 핵심이며 길 안내자이다. 누군가 걸어가길 바라는 글의 눈인사이다. 책의 표지는 그 첫인상의 배경이며 표지 안에 별처럼 박혀있는 제목은 정물화 속 정물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의 제목 『필사적 글쓰기 수업』의 필사적은 必死(반드시 죽음)와 筆寫(베끼어 씀)를 오가는 양면 거울이다.
필사(筆寫)는 오랜 역사의 산물이기도 하다. 동서양을 막론하고 문자가 생긴 이래 인쇄술이 발전하기 전부터 지식을 전달하는 최상의 도구였다. 인쇄술이 발달해 수많은 자료와 작품이 생산된 후에도 필사는 살아남아 인간의 사고를 도와주고 위로를 주기도 하며 창의적 활동에 일조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효용에 대해서는 사람마다 의견이 분분하다. 대조군이나 긴 기간, 많은 실험 군이 필요한 이유 등으로 필사의 효용에 대한 직접적인 논문을 찾기는 어렵다. 하지만 많은 작가와 전문가가 필사를 권하는 경우가 있다. 이 책도 동기의 하나로 볼 때 크게 다르지는 않다.
글을 베껴 쓰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요?
눈으로 읽을 때보다 조금 더 깊이 이해할 수 있습니다. 이해만이 아닙니다. 깨달음, 위로를 얻을 수도 있습니다. 눈만이 아니라 손도 같이 움직이니 느리고 힘들지만, 베껴 쓰는 과정을 통해 작가의 더디고 힘든 '창작 과정'을 간접 경험할 수 있습니다.
9쪽/『필사적 글쓰기 수업』 중에서
필사(筆寫)를 쓴다고 반드시 필사(必死) 적으로 쓸 필요는 없다. 작가님의 말씀에 따르면 우리는 알게 모르게 이미 필사를 경험한 세대였다. 수업 시간에 선생님의 필기나 자료, 말씀 등을 옮겨 적기, 받아쓰기 시험도 일종의 필사로 보았다. 필사를 단순히 토씨 하나 안 틀리고 똑같이 쓰는 것을 넘어서서 다시 쓰기, 새로 쓰기, 나만의 글로 요약하기, 재창조하기 등 그 범위는 다양하고 넓다. 물론 AI나 아이패드가 익숙한 현세대는 그 횟수가 적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우리가 손으로 하는 행위 자체에 의미를 부여한다면 타이핑을 하는 행위를 필사의 가족으로 삼을 만하지 않을까.
명저의 제목, 베스트셀러가 아니어도 좋다. 필사는 내 마음에 와닿는 글, 나를 멈추게 하는 글, 내게 의미 있는 작품을 골라 쓰는 행위기에 다양한 글을 조금씩 쓰며 의미를 생각하고 글로 옮기는 작업 자체로 남는 것이 있을 테니까. 이 책의 목차를 보면 그러한 선택의 범위와 가능성을 열어주며 따뜻한 사례를 전한다.
제목 베껴 쓰기
첫 문장
시
에세이
인문학
명작 소설
각본
단편소설
노벨문학상
작가 소개 쓰기
등 열 가지 꼭지에서 작가님이 엄선한 글에서 들어보거나 읽어 본 반가운 문구를 만나기도 하고 전혀 들어보지 못한 새로운 작품을 만나기도 한다. 나는 처음부터 따라 쓰지 않고 한 번 훑어보는 기분으로 쓱 읽기만 하다가 두 번째 다시 읽으며 천천히 따라 쓰기를 하고 있다. 이번에는 마감을 따로 두지 않고 꾸준히 20일 동안 만이라고 해 보자는 마음으로 쓰고 있는데 명상 그 이상의 무언가를 느낄 수 있어 좋았다. 처음에 표시해 두었던 문구나 제목, 작가가 두 번째 읽을 때 표시할 때는 다른 부분이 눈에 띄어 표시하게 되었다.
느리게 필사하는 과정에서 좋은 점은 또 다른 경험과 통찰을 선사한다. 단순히 좋은 문구를 제시하지 않고 어떻게 읽고, 어떻게 필사를 할 수 있는지 마치 안내자처럼 이런저런 방법을 소개하기도 하고 권하기도 한다. 왜 이 부분을 골랐는지, 어떤 이유를 멈추었는지, 어떤 생각이 드는지, 어떤 의미로 다가오는지 등등 잠시 멈추고 생각하다 보면 어느새 글이 써지고 나만의 감상문이 된다. 좀 더 조사하고 싶기도 하고 좋은 문구를 다시 메모하며 기억하고 싶어진다.
어느 영상에서 들은 말이다. 황석영 작가님께 질문이 주어졌다. 요즘 텍스트힙이니 하는 독서 사진이나 글쓰기 인증은 일종의 과시를 위한 '척'의 행위 아니냐고. 그분의 대답은 이랬다.
"그래요. 그럴 수도 있죠. 하지만 명품 디올 백보다는 나은 사치 아닌가요."
재치 있으면서도 수긍이 가는 말이었다. 독서도, 글쓰기도, 필사도 우리는 크고 작은 장비가 필요하며 어느 정도는 허세도 들어있기도 하다. 수백만 원 하는 명품보다는 가성비가 꽤 좋은 것. 하는 척, 읽는 척, 쓰는 척을 위해 접근이 비교적 쉽고 부담이 적은 필사를 하기 위해 상냥하게 다가오는 책, 『필사적 글쓰기 수업』를 한 번 읽어보는 건 어떨까. 나의 속도대로 나의 스타일대로 쓰고 싶다면 금상첨화다.
작가: 임리나
출판사: 북도슨트
출판일: 2025년 2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