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운데 버스 타고 가지."
스터디 카페에 갔다가 귀가하기 전에 안드레아에게 받은 문자였다. 잠시 망설이다 그냥 걸어가기로 했다. 내 걸음으로 25분 정도는 각오해야 하는 거리지만 못 견딜 정도로 추운 날씨는 아니었다. 무엇보다 그렇게라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사실 속마음은 버스를 타고 편하고 따뜻하게 가고 싶었다.
전에 다른 글에서 언급했지만 김민식 작가님이 말씀하신 수고스러운 공부의 효능이 또다시 떠올랐다. 성능 좋은 AI가 있으나 여전히 외국어 공부는 여전히 필요하다는 말씀이. 자동차와 비행기가 있어도 사람들은 여전히 걷고 뛰는 것처럼 인간은 뇌를 움직이며 생각하는 존재로서 얻는 효용이 크다는 의견도.
어린 시절 보았던 풍자 삽화와 기사도 돌이켜보았다. 팔다리는 가늘지만 사람의 머리는 ET 만큼 크고 배가 나온 인간의 모습을 형상한 이미지였다. 그때 '설마, 그렇게 될까'라고 생각했던 과거가 유사하고 가능한 현실이 된 것 같다. 몸이든 정신이든 움직이지 않으면 편하긴 하다. 대신 몸밖은 비대해지고 속은 병에 취약해지며 정신도 멍해지는 걸 각오해야 한다.
이런 거창한 상식과 이론이 아니라도 내가 이리저리 맞추며 채워나가는 삶의 퍼즐을 살펴본다. 나는 왜 굳이 독서를 하고 필사를 하며 공부를 하는가. 그것도 아날로그 방식으로. 전자책이 있는데 돈도 들고 무거운 물성의 책을 좋아한다. 굳이 안 해도 되지만 하더라도 블로그나 한글 문서에 해도 되지만 굳이 노트를 꺼내 힘을 주며 글씨를 써 내려간다. 수업 교재로 PDF를 제공받지만 때로는 번거로워도 인쇄를 해서 종이 자료 형태로 공부한다. 펜과 형광펜을 들고 직접 메모하며 태그를 붙이는 작업을 해야 뭐라도 머리에 들어오는 느낌이다.
이제야 공리주의 철학자 밀(John Stuart Mill)의 말이 이제야 조금 이해가 가는 것 같다. 나는 과연 '배부른 돼지보다는 배고픈 소크라테스'를 지향하고 있는가. 만족스러워 안주하는 것보다 끊임없이 탐구하고 주체적인 삶을 지향하고 있는가. 혹여 자문할 때면 솔직히 자신 있다고 할 수 없다. 배도 부르면서 질문하며 탐색하는 삶을 살면 안 되는가. 자꾸 요령이나 지름길을 찾고 싶다. 만족하는 삶이 늘 잘못된 것은 아니지 않은가. 때로는 만족하면 감사하게 되고 행복을 느끼기도 한다. 불평과 불만이 지나칠 때면 필요한 태도이기도 하다.
때로는 만족의 삶에서 잠시 나와 불편한 삶, 불만족의 세계로 들어가야 할 때도 있다. 물론 AI와 같은 도구에 맡기는 것도 필요하다. 나 또한 정보를 빨리 얻거나 일의 효율을 위해 종종 이용한다. 하지만 오로지 그에 의존하지는 말아야겠다고 스스로를 달래기도 한다. 나의 생각마저 외부에 맡기고 '나 대신 생각해 줘'라며 늘 자발적 결정 장애의 삶을 살고 싶지는 않다. 그러고 보면 문명이 발전할수록 외부에 휘둘리는 나를 발견한다. 문명의 아이러니라고나 할까.
어쨌든 나는 오늘도 읽고 쓰고 생각하려고 노력한다. 언제까지 지금의 강도로 할 수 있을지는 모르겠다. 힘이 부치면 (지금도 힘이 부친다) 강도와 횟수를 줄이더라도 멈추고 싶지는 않다. 꾸준히, 꾸역꾸역 반복의 힘을 믿으며. 인간은 누구나 인정욕구가 있어서 외부의 시선에 끌려다니는 나를 발견하기도 한다. 그런 나를 인식할 때마다 다시 나의 몸과 마음을 포맷하고 싶다. 뒤엎는 혁명이 아닌 온고지신의 자세로 나를 다독이고 싶다.
그래서 나는 컴퓨터와 현대 문명의 기기, 발명품을 이용하기도 하지만 손에 만져지는 책과 노트를 꺼낸다. 안경을 써도 시력이 예전 같지 않고 때로는 섬망 증세로 사물이 휘어 보여 집중이 안 된다. 두려움을 넘어 중단하고픈 마음이 굴뚝같아질 때도 있다. 그래도 내게 남은 감각에 감사하며 최대한 사용하려 한다. 누군가는 다시 내려올 산을 굳이 힘겹게 오르듯 나도 굳이 수고와 불편한 길을 가고 싶다. 편한 것에만 매몰되어 멍한 좀비처럼 살고 싶지 않기에. 의지 없이 조종당하는 존재가 되지 않기 위해. 나는 나의 파트너가 되어 오늘은 불편함을 체험해 보자고 달래고 어른다. 프로처럼 되지는 못해도 아마추어처럼 할 수는 있지 않은가.
'조금만 움직여 보자. 조금만 불편해 보자. 조금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