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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애니마리아 May 13. 2024

16화: 가족, 한글 과자, 그리고 달팽이 크림


 올해 5월 첫째 주 주말, 예년과 다른 휴일을 보냈다.



  어버이날을 맞이해서 큰집에 오신 시부모님을 뵙고 감사드리는 날


마침 얼마 전에 새집으로 이사하신 큰집 형님댁에 가서 축하드린 날


큰집을 중심으로 시댁 형제들, 조카들이 모여 함께 그동안의 소식을 전하고 식사를 한 날


무엇보다 군대에서 첫 외출을 허가받아 큰집으로 찾아온 아이를 친척들과 함께 볼 수 있어서 각별한 날. 



  올해는 어린이날이 일요일과 겹쳐 대체휴일이 주어져 긴 연휴가 되었다. 그래서인지 명절이 아니면 얼굴 보기가 쉽지 않은 친척들을 거의 다 함께 볼 수 있는 자리이기도 했다. 물론 개인적으로 군대에서 잠시 나온 아이를 보게 되어 유난히 좋았다. 이도 아들을 군대에 보낸 엄마로서 느끼는 감정인 듯하다. 



  단 비가 주룩주룩, 그것도 연휴 내내 내렸다는 사실이 아쉽기는 했다. 그래도 봄비였고 나름 낭만이 있었다. 큰집을 향해 가는 차 안에서 비를 바라보며 다소 흥분되고 긴장되는 마음을 추스를 수 있으니 말이다. 하지만 막상 큰집 앞에서 미리 만나기로 한 아이가 우산도 없이 서 있는 모습을 보니 왠지 모르게 마음이 짠했다. 편의점에서 우산을 좀 사지 그랬냐는 내 잔소리에 아이는 씩씩한 표정을 지으며 대답한다.



   "군인은 비 좀 맞아도 돼요, 엄마. 괜찮아~"


   "음......"



  내가 아이의 입장이어도 비슷하게 말했을 것 같긴 하지만 마음속으로는 '그러다 감기 걸리면 훈련이나 근무할 때 힘들 텐데.'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평소 비염에 목감기에 자주 걸리는 아이의 체질을 알기 때문이다. 문득 얼마 전 유튜브 알고리즘으로 보게 된 김경일 교수님의 추천 책 <50이면 육아가 끝날 줄 알았다>라는 제목이 떠올랐다. 부모가 아무리 '고령이어도 함께 늙어가는 자식을 볼 때는 늘 물가에 내놓은 아이처럼 느껴진다'라는 말이 묘하게 오버랩되기도 했고.



  오랜만에 만난 친지들, 기뻐하시는 시부모님을 보면서 가만히 그들의 시선을 따라가 보았다. 시댁 식구가 다 모이면 친정에 비해 거의 두, 세배의 인원이 모인다. 정신이 없을 것 같은데도 시부모님은 나이가 들어가는 자식들, 손주들을 한 명 한 명 챙기시며 그저 바라만 봐도 흐뭇해하시는 표정에 공감했다. 식구가 많은 만큼, 세월이 긴 만큼 얼마나 많은 풍파를 겪어 오셨을까. 점점 빠른 속도로 체력이 약해지고 아파지는 횟수가 늘어가는 나도 하루하루가 두렵기도 하고 아쉽기도 한데, 부모님은 오죽할까 싶기도 했다. 그래도 부모님의 흰머리와 주름에 자식들에 대한 사랑이 가득해 보였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아이가 다가와 '엄마'하고 부른다. 잠시 따라오라고 하더니 구석진 방으로 가서 놓아둔 가방을 뒤적거린다. '아, 어디 있지? 엄마, 잠시만요!' 빨리 '짠!'하고 멋있게 뭔가 보여주고 싶어 한 듯한데 마음대로 안 되어 당황한 모양이었다. 나는 그 모습이 귀여워서 짐짓 모르는 척 잠시 뒤로 물러섰다. 잠시 후 내게 다시 다가온 아이가 건네는 물건은 우선 달팽이 크림 세 개였다. 하나는 할아버지와 할머니용, 하나는 안드레아, 하나는 나를 위해 사 온 것이었다. 화장을 하는 여자라면 한 번쯤 써 보고 싶어 하는 달팽이 크림을 군인 특가로 구입해 온 아이에게 받는 선물은 그 어떤 보물보다 더 귀하게 느껴졌다. 사람 수대로 준비해오지 못해 미안해하는 아이를 보고 고마움의 눈길 한 번 보내고 다시 식탁으로 돌아와 앉았다. 



  그게 끝이 아니었다. 형님들과 앉아 있는데 아이가 과자 봉지 두 개를 들고 와서 살포시 올려놓았다. 생전 처음 보는 '한글 과자'. 실제로 우리나라에서 최초로 시판되는 과자였다. 놀랍게도 이 과자에 대한 아이디어를 생각하고 실행에 옮긴 사람은 바로 '대한 외국인'으로 많이 알려진 타일러 라쉬(Tyler Rasch)라는 분이었다. 나중에 그의 이야기를 검색해 보고 감탄을 금치 못했다. 이 과자를 만든 사연에 대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는 영어 알파벳 과자(ABC 과자), 영국 과자, 히브리어 과자, 인도 과자 등 문자가 있는 나라는 거의 다 있는데 500년 역사를 자랑하는 한국에서 한글을 나타내는 과자가 이제껏 왜 없는지 의문이 들었다고 하는 게 아닌가. 우리가 생각지도 못한 시선으로 우리나라를 바라보고 실천한 용기도 대단하지만 경주마처럼 앞만 보고 달리는 한민족 같아서 안타깝고 약간은 부끄럽기도 했다. 



  몇 년 전 '비정상회담'이라는 프로그램 때부터 깊은 인상을 받았던 대한 외국인 중 한 사람, 타일러 씨. 무슨 인연인지 아이는 외출을 나오자마자 잠시 들른 곳에서 한글과자를 홍보하고 있는 타일러 씨를 마주쳤다고 한다. 기념사진까지 찍고 과자를 구해 온 아이도 신기했다. 큰집에서 친척들과 나누어 먹었지만 너무 아쉬워 과자 봉지를 챙겨 왔다. 다시 살펴보니 ㄱ, ㄴ, ㄷ, ㅗ, ㅑ 등은 다 먹고 'ㅏ'만 하나 남아있었다. 이런 추억이 또 언제 있을까 싶어 사진도 한 장 찍었다. 



  한 가지 더 재미있는 사실이 있다. 과자의 위쪽 로고 부분 그림을 보면 호랑이와 곰돌이가 보인다. '우리말이 맛있다'라는 문구와 함께. 그리고 두 가지 맛이 있다. 쑥맛과 마늘맛. 마늘맛은 그리 강하지 않았고 쑥맛은 은근히 향이 나서 좋았다. 연상되는 게 있는가? 바로 단군신화를 생각하고 만든 로고라고 했다. 우리나라 사람보다 더 우리를 잘 아는 외국인을 보면 소스라치게 놀랄 때가 있다. 한민족의 얼까지 생각한 그 마음이 고맙기에. 



  비 오는 날의 만남, 가족, 그 안에서 즐기는 한글과자의 달콤한 기운이 그리운 추억이 되었다. 군대, 군인에 대한 소재가 더 이상 없어 보이는 때에 즐길 거리, 나눌 거리, 생각할 거리를 통해 글 쓸 거리를 준 아이에게 감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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