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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희 Apr 26. 2024

이 정도면 취업 사기 아니야?

찍먹하고 나온 스타트업 이야기

임원급으로 스카우트가 되는 것 아닌 이상, 해외경력만 가지고 국내에서 원하는 일을 찾는 것은 쉽지 않았다. 아무리 해외 대기업 출신이다 하더라도 검증이 어렵고 이왕이면 국내 경험이 많은 영어능통자를 선호했다. 아무래도 사업의 주체가 한국이다 보니 내수시장을 더 잘 이해하고 있는 사람이 더 경쟁력이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나는 detour 즉 우회하는 전략을 선택했다. 또 당시 오프라인 경험 밖에 없었던 나는, 희망하는 곳을 가기 위해서라도 온라인으로 트랜지션을 하기 위해서라도, 연결다리가 필요했다. 그리고 그 연결다리로 선택한 것은 스타트업이었다. 스타트업을 경험해 보고 싶은 호기심도 있었고 무엇보다 보수적인 한국 기업문화를 과연 내가 잘 견딜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 컸다. 그런 면에서 어쩌면 조금은 더 자유로운 스타트업이 더 잘 맞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끝이 없는 근무시간

애초에 나의 목표는 커리어의 진도보다는 준수한 워라밸을 지키며 한국을 살아보는 것이었다. 하지만 시대를 역행하는 근무시간 9 to 7인 곳에 입사했다. 캐나다에서는 재택이 자유로웠고 야근도 만만치 않게 했기 때문에 큰 문제가 없을 거라 (잘못) 판단했다. 큰 착오였다. 7시에 정시퇴근한 일은 열손가락 안에 꼽힌다. 기본적으로 밤 열 시 아니 자정을 넘기고 퇴근하는 일이 다사했고 아예 새벽까지 이어질 때도 많았다. 동료들과 퀭해진 얼굴과 굽은 어깨를 피며 "내일 봐요" 대신 "있다 봐요" 하며 퇴근했다.


긴 근무시간은 채용에 있어서도 허들로 작용했다. 이 문제에 대해서 대표와 몇 차례 씨름해 보았지만 철옹성 같았다. 이유는 단 하나였는데, 그 정도의 각오 없이 회사의 문턱을 넘지 말라는 것이다. 하지만 내 생각은 조금 달랐다. 능력 있는 사람은 능력 있는 대우를 원한다. 그들은 얽매이는 것을 싫어하며 선택권을 원한다. 하지만 회사가 요구하는 근무시간은 이와 상충되는 가치라고 생각했다. 스타트업은 한 명이 여러 명의 몫을 해내는 것이 매우 매우 중요하다. 때문에 채용에 있어서도 신중하고 특히 한 마리의 미꾸라지가 전체 분위기를 흐리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그만큼 열정이 필요하다는 것은 이해하지만 오히려 열정과 능력을 갖춘 이들이 애초에 얼씬거리지도 않게 하는 허들이 된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입사 셋째 날 직무변경?

근로계약서에 적힌 나의 직무는 전략 책임/수석 정도였다. 하지만 막상 입사해 보니 전혀 다른 그림이 펼쳐졌다. 인터뷰 때만 해도 새로 만든 직무이며 소규모의 팀하나를 꾸려서 맡는 것으로 이해했는데, 갑자기 전체 사업부를 맡았으면 한다고 했다. 물론 피보팅의 숙명을 받아들여야 하는 스타트업이지만 직무도 매일 피보팅이 되는 것인가? 그럴 줄 알았으면 처음부터 다른 보상을 원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빙산의 일각이었다. 회사가 내게 맡기고자 하는 일을 이미 맡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같은 자리를 두고 몰래 한 명을 더 채용한 것이다. 어쩐지 팀 분위기가 어수선했다. 무언가 잘못됨을 감지했지만 이런 일은 처음이라 혼란스러웠다. 그리고 얼마 되지 않아 새로 영입된 CFO가 나를 조용히 불러 말했다.


"역사적으로 우리나라에서 왕이 두 명이면 어떻게 됐는지 알아요?"




/다음 편에 계속



※ 지극히 개인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개인적인 생각과 이야기를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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