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음 대신 삶을 택하다

삶의 서사를 다시 쓰다.

by 애니유칸
나는 매일 밤 죽음을 꿈꿨다.
창밖으로 새벽이 찾아오는 소리가 들려올 때까지 잠 못 이루며 생각했다.
‘내 인생은 이미 끝났다 ‘


거울 속의 나는 더 이상 내가 아니었다. 희미해진 눈빛과 굳게 다문 입술, 그저 하루하루를 버텨내는 텅 빈 껍데기만 남아 있었다. 나는 조각난 삶의 파편들을 주워 담을 힘조차 없었다.


어느 날 자고 일어나 보니, 백발이 되어 자연적으로 소멸되는 것만을 꿈꾸며 살았다. 그저 모든 것이 자연스럽게 끝나기를 바랬다. 그것이 내 삶의 유일한 축복이라고 생각했다.


낡은 사진첩 속 흑백 사진을 들여다볼 때마다 나는 해맑게 웃고 있었다. 그러나 내 기억 속의 나는 늘 혼자였다. 손을 잡고 걸어가던 엄마의 온기는 기억나지 않고, 그저 텅 빈 길목에 홀로 남겨진 아이의 쓸쓸함만 선명했다.


심리학에서 애착 이론(Attachment Theory)은 이러한 어린 시절의 경험이 이후의 관계 형성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설명한다. 특히 주 양육자와의 안정적인 애착을 형성하지 못하면, 성인이 되어서도 관계에 어려움을 느끼거나 불안감을 경험하기 쉽다.


어쩌면 불안정했던 나의 어린 시절은 ‘나는 혼자다'라는 낡은 각본을 만들어냈고, 그 각본이 내 기억의 모든 페이지를 지배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사진 속 흑백 세상에서 나는 엄마와 함께였다. 하지만 나의 기억은 그 순간의 따뜻함보다 외로움을 더 크게 부각시켰다.


나는 스스로 안정적인 사랑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부정하며, 행복했던 기억마저 희미한 조각들로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 불완전한 기억 속에서 나는 늘 혼자였다.


내 안의 나를 찾아 떠나는 여정


중년의 위기는 단순히 신체적인 노화나 사회적인 역할 변화에서 오는 불안감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스위스의 정신과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칼 융(Carl Jung)은 인생의 후반기를 ‘개성화 과정(Individuation)'이라고 명명하며, 이는 억압된 무의식의 측면들을 통합하고 진정한 자기를 실현해 나가는 심리적 성장 과정이라고 설명했다.


마치 오래된 집을 허물고 다시 자신의 의지에 따라 새로운 건축물을 세우듯, 중년의 시기는 그동안 외면해 왔던 내면의 그림자를 마주하고 통합함으로써 더욱 온전한 자신으로 나아가는 중요한 전환점인 것이다.


내가 걸어온 길을 돌아보니, 나는 내내 나 자신을 '실패한 인생'이라는 하나의 틀 안에 가두어 두고 있었다.


젊은 날의 뼈아픈 실패들은 내 기억 속에서 너무나도 생생하게 남아 있었고, 나는 그때의 기억을 곱씹으며 '나는 무능한 사람'이라는 부정적인 결론을 끊임없이 되뇌었다.


인지 심리학에서는 이러한 사고방식을 ‘인지 왜곡(Cognitive Distortion)'이라고 부른다. 특정 사건에 대해 비합리적이고 극단적인 방식으로 해석하여 부정적인 감정과 생각을 반복하게 되는 것이다.


일기장을 다시 펼쳐보니, 나는 내내 '실패했다'라고 썼지만, 그 행간에는 '최선을 다했다', '노력했다', '포기하지 않았다'는 간절한 외침들이 숨겨져 있었다.


나는 내 삶의 서술자로서, 스스로를 패배자로 만들고 있었던 것이다. 나에게는 보잘것없어 보이는 부정적인 기억들이 끊임없이 재생산되며 '나는 행복하지 않다'는 거대한 그림을 완성했던 것이다.


긍정 심리학(Positive Psychology)의 창시자인 마틴 셀리그만(Martin Seligman)은 인간에게는 고통과 역경을 극복하고 성장할 수 있는 내적인 힘, 즉 '심리적 강점(Character Strengths)'이 존재한다고 강조한다.


하지만 나는 그동안 내 안에 숨어있는 용기, 회복탄력성, 지혜와 같은 긍정적인 자질들을 외면해 왔다. 나의 기억은 오직 내가 겪은 고통만을 확대하고 재생산하며, 나를 더욱 무력감에 빠뜨리는 역할을 했을 뿐이다.


삶의 그림자를 직시하는 일은 두려웠고 고통스러웠지만, 칼 융의 '개성화 과정'에 대한 이해를 바탕으로 내 안의 어둠을 용기 내어 마주했을 때, 나는 잊고 지냈던 내면의 희미한 빛을 비로소 발견할 수 있었다.


‘개성화'는 결국 억압된 무의식의 다양한 측면들을 의식으로 통합하고, 가면 뒤에 숨겨진 진정한 자기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던 것이다. 나는 이제 죽음을 기다리는 대신, 내 안의 또 다른 나를 찾아 떠나는 모험을 시작했다.


삶의 주인이 되는 용기


나는 내 삶의 이야기를 다시 쓰기로 결심했다. 이 결심의 배경에는 기존의 심리 치료와는 조금 다른 관점에서 시작된 ‘내러티브 치료(Narrative Therapy)‘ 가 있었다. 이 치료법은 우리가 겪는 심리적 문제의 원인을 개인의 결함에서 찾기보다, 개인이 스스로를 규정하는 문제적 이야기에 있다고 보았다.


즉, "나는 실패한 사람"이라는 이야기에 갇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객관화하고 새로운 관점에서 재구성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다.


‘나는 실패한 인생'이라는 오랫동안 나를 옭아매던 이야기를 버리고, ‘수많은 역경 속에서도 굴하지 않고 마침내 희망을 발견한 자의 기록'이라는 새로운 서사를 써 내려가기로 한 것이다. 그리고 내가 흩어진 기억의 퍼즐 조각들을 다시 주의 깊게 살펴보며, 과거의 경험들을 새로운 의미로 재해석하기 시작했다.


어린 시절의 상처는 단순히 고통스러웠던 기억이 아니라, '내면의 힘을 키우는 토대'가 되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젊은 날의 좌절 역시 '성공으로 나아가기 위한 값진 배움의 과정'이었다고 의미를 부여했다.


심리학을 공부하면서 얻게 된 가장 중요한 통찰은 바로 이것이었다. 기억은 객관적인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현재의 나와 감정에 의해 끊임없이 재구성되는 주관적인 경험이라는 사실이다.


내가 어떤 조각에 집중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과거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현재에 영향을 미친다.


과거의 불완전한 기억들이 오랫동안 나를 아프게 했다면, 이제는 그 기억들을 내가 원하는 대로 재정립하여 나를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동력으로 전환할 수 있었다.


나는 더 이상 거울 속의 낯선 얼굴을 외면하지 않는다. 오랜 시간 동안 나를 괴롭혔던 과거의 그림자들을 인정하고 받아들임으로써, 나는 비로소 현재의 나를 온전히 마주할 수 있게 되었다.


오래된 사진첩 속 굳어있던 어린 시절의 나를 이제는 따뜻하게 안아줄 수 있다. 그리고 내가 지금 하고 있는 작은 노력들, 과거에는 보잘것없다고 치부했던 소중한 경험들이 모여 세상에 하나뿐인 나만의 독특한 삶의 퍼즐을 완성해가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다.


내 삶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이제야 비로소 온전한 나로 살아갈 힘을 얻은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과거의 어둠에 갇혀 죽음을 기다리지 않는다.


내일이 오면, 나는 또 다른 새로운 퍼즐 조각을 찾아 망설임 없이 나아갈 것이다. 당당하게, 그리고 힘차게. 내가 쓰고 있는 이 희망의 이야기는 아직 끝나지 않았고, 나는 이 이야기의 마지막 페이지를 긍정과 감사로 가득 채워나갈 것이라고 확신한다.


삶의 진정한 의미는 마지막 순간이 아니라, 매 순간 스스로 만들어가는 이야기에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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