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과 인간을 잇는 대파
내 마음속 어딘가에 늘 작은 텃밭을 가꾸어보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다.
그러나, 나는 씨앗을 언제 어떻게 뿌려야 하는지 조차 알지 못했다. 물론 인터넷 서치를 하면 알 수 있겠지만, 모니터 안의 지식은 흙 앞에서는 힘을 잃었다.
몇 해 전, 뒷마당 잔디를 걷어내고 작은 텃밭을 일궜다. 한국 마켓에서 상추, 가지, 오이, 호박 씨앗을 사 와 흙 속에 묻으며, 내 마음속에도 한 줌의 꿈을 심었다. 한 달쯤 지나자 연둣빛 싹이 고개를 내밀었고, 매일 아침 물을 주며 자라는 모습을 바라보는 일은 설레는 기쁨이었다.
그러나 기쁨은 오래가지 않았다. 토끼와 다람쥐, 오소리까지 밤마다 펜스를 뚫고 들어와 모조리 쓸어갔다. 새싹이 돋으면 뜯어먹고, 때로는 땅을 파헤쳐 씨앗과 뿌리까지 헤집어 놓아 결국 텃밭은 망가지고 말았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정성껏 가꾼 청포도마저 때늦은 여름날 아침,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포도송이가 무르익는 모습을 바라보며 읊조리던 이육사 시인의 “청포도“와 함께…
“내 고장 칠월은 청포도가 익어가는 계절
마을 전설이 주저리주저리 열리고 …”
내일은 청포도 송이를 하얀 습자지로 곱게 싸주어야지, 마음속으로 다짐하며 잠자리에 들었다. 그러나 다음 날 아침, 이슬 머금은 포도를 기대하며 마당에 나간 순간, 나는 소스라치게 놀랐다. 그 풍성했던 포도송이는 그림자조차 없다.
밤새 다람쥐가 몽땅 먹어치운 것이었다. 허탈감으로 우두커니 앉아 있는데… 어린 시절 할머니의 말씀이 떠올랐다.
“동물들도 먹게 내버려 둬라. 같이 살아야지. 우리는 남은 것만 먹어도 된다.”
그러나 우리 동네 동물들은 인정사정없이 단 한 톨도 남기지 않았다. 그날의 포도나무 사건은 지금도 내게 가슴 아픈 기억이다. 나는 결국 텃밭을 포기하고, 텃밭에 흙을 갈아엎고 자갈을 덮으며 다짐했다.
“다시는 텃밭을 만들지 말자 “
그러나 세월은 내 다짐을 비껴갔다. 앞마당 나무들을 베어내고 생긴 빈자리 앞에서 나는 또다시 흔들렸다. 무엇을 심을까. 장미를 심어 화려한 장미 정원을 만들까…?
로알드 달, 바쎄바, 세인트 스위던, 스트로베리 힐, 스피릿 오브 프리덤, 크리스티나… 이름만으로도 마음이 설레는 장미들을 찾아보며 밤을 보냈다. 그러나 내가 원하는 장미는 모두 희귀종이라 가까이에서는 구할 수 없었다.
인터넷으로도 이미 계절이 지나 모두 품절이었다. 장미는 가을까지 기다려야 했다. 그때 나는 스스로를 설득했다.
“그러면 텃밭을 다시 해볼까? 앞마당까지 동물이 오진 않겠지.”
그렇게 다시 용기를 내어 흙을 일구고, 올개닉 비료를 섞어 씨앗을 뿌렸다. 시기적으로 좀 늦은감이 있어 조급한 마음에 봉지를 뜯어 무작정 흩뿌렸다. 그러나 지난번 실패가 떠올라 큰 기대는 하지 않았다.
그런데 뜻밖의 일이 벌어졌다. 들깨와 대파가 싹을 틔우더니, 믿을 수 없을 만큼 무성하게 자라났다. 정작 내가 원했던 무, 가지, 상추, 청양고추는 싹조차 내지 않았지만…,
텃밭은 내게 조용히 일러주었다. 모든 씨앗에는 다 제 나름의 때가 있다는 것을. 자연의 순리를 거스르면 싹이 트지 않는다는 것을...
여름이 깊어갈수록 깻잎과 대파는 속도를 내며 자랐다. 그 양은 차고 넘쳤고 그 것을 감당하지 못해 깻잎 장아찌를 담갔다,
물론 식탁 위에는 날마다 깻잎나물을 올렸다. 평생 이렇게 많은 깻잎을 먹어본 적이 없어 혹시 너무 먹어 건강에 해롭지 않을까, 웃음 섞인 걱정마저 들었다.
풍요는 밥상의 즐거움에 그치지 않았다.
평소 ‘하이~ ’ 인사만 나누던 이웃이 대파를 보고 말을 걸어왔다. 나는 기꺼이 뽑아내어 주었고, 그날 이후 대화가 시작되었다. 또 다른 이웃은 “어떻게 토마토를 잘 키우냐”라고 묻기도 했다.
텃밭은 이렇게 사람과 사람 사이에 물길을 열어주었다. 한국에 있는 친구에게도 사진을 찍어 보냈다.
“우리 집 깻잎이 풍년이야.”
친구들은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너 한국 올 때 깻잎 장아찌 가져와라.”
예전에는 한국에 갈 때마다 친구들이 음식을 챙겨주었는데, 이제는 내가 키운 깻잎 장아찌를 챙겨가야 할 차례가 된 것이다.
깊어가는 8월의 땡볕 아래, 텃밭은 나에게 가르쳐준다. 모든 것에는 저마다의 시간이 있다는 것을.
삶은 늘 내가 기대한 대로 움직이지 않는다는 것을. 그러나 때로는 뜻밖의 곳에서 기적 같은 풍요가 찾아온다는 것을....
늦봄 무심히 흩뿌린 씨앗이 그랬다. 바라던 무와 상추는 나오지 않았지만, 깻잎과 대파는 내게 넘치는 결실을 주었다. 흙에서 자란 건 씨앗이었지만, 그 씨앗이 키워낸 것은 결국 사람과 사람을 잇는 다리였다.
오늘도 나는 아침 햇살 속에서 텃밭으로 향한다. 초록빛 깻잎을 따고, 붉고 노란 백일홍을 바라본다. 그리고 조용히 읊조린다.
“청포도 익어가는 계절은 … 주저리주저리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