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의 여행

다소 늦은 MBTI 이야기 혹은 치앙마이 여행 일기.

by 작은 행복

처음 MBTI가 유행? 하기 시작했을 때 사실 나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

혈액형에 따른 성격풀이나 사주나 똑같이 그저 통계적으로 그렇다 하는 것일 뿐, 그 통계에서 벗어나는 경우를 왕왕 볼 수 있었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에 하나라고 믿었기 때문이었다. 뭐 맞는 얘기들도 종종 있지만.

예를 들어 구석 자리를 좋아한다거나 남의 얘기는 잘 들어주지만 내 얘기를 잘 안 한다거나 하는.

하지만 그런 것들 역시 상황과 성장과정이 길러온 개인의 성향일 뿐 타고난 천성은 아니라고 믿기 때문이다.


그러다 직장동료들이 나에게 본인의 MBTI를 아느냐고 물으면서 나에게 J일 거야, 혹은 F일 거야 하며 서로 나의 성향을 예측하며 떠들어 대는 것을 보고는 조금 불쾌한 기분이 들게 되었다.

아니... 자기들이 뭔데 나에 대해서 잘 알지도 못하면서 내 성격에 대해서 유추하고 판단하는 건가. 나도 나를 잘 모르는데?

나는 나의 어떤 것들이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게 하는지 알고 싶어 졌고, 결국은 나의 MBTI가 궁금해졌다.

다소 지루하기까지 한 길고 많은 질문들에 한참 답을 하고 나서야 내 MBTI를 알게 되었고 그들이 예상한 것과 완벽하게 들어맞는 것에 놀라다가 문득 의심이 들었다. 이것은 남들이 아는 나일뿐, 나 자신이 생각하는 나의 성격은 그와 다를 수도 있다고.

나의 성격유형에 대해 부연설명을 하는 글을 읽다가 나는 단 두 줄만에 그들의 통찰력에 감탄하고 말았다.

그 설명의 첫 줄은 거짓말을 하는 것보다 예의 없게 말하는 것을 싫어한다.

둘째 줄은 여행할 때 짐이 많다였다.

나는 나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이며 그저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 나는 여행할 때 짐이 많다. 내게는 "혹시나", "만약에"와 같은 병이 있기 때문이다.

혹시나 이게 필요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에 이런 일이 생기면 어떻게 해 하는.

장기여행은 늦어도 석 달 전에는 계획되어야 하며 이동수단이나, 숙소는 모두 결제가 끝나있어야 하고, 한 달 전에는 동선이 다 짜여 있어야 한다. 물론 1 지망이 불가할 때 수행할 2 지망, 3 지망까지.

이동에 필요한 교통수단이나 도보로 이동할 때 거리지도 까지도 한 번은 봐두어야 한다.

각 날짜에 따른 각 시간대별로 서로 다른 색으로 구글지도에 스케줄이 짜여있어야 한다.

하루에 가능한 끼니가 두 끼일 때도 가능한 식당 리스트는 10개쯤 있어야 마음이 놓이고 그것이 계획대로 실행되지 않으면 불안한 나는 전형적인 대문자 J인 것이다.

정작 여행 가서 나는 쓰지 않아도 같이 간 동행이 찾을 때 빌려줄 수도 있는 아이템까지도 챙겨간다.

동행이 있을 때는 어김없이 " 넌 왜 이리 짐이 많냐?"는 소리를 들으며, 여행하는 동안에는 "혹시 이것도 있어?"를 빌려준다.


이런 대문자 J의 여행자에게 지난 치앙마이 여행은 아주 예외적인 것이었다.

출발 한 달도 남지 않은 때에 여행을 정하고 오랜 검색도 거치지 않고 비행기 티켓을 끊고, 묵을 곳을 구하고. 출발할 날짜 겨우 한주를 남겨두고도 스케줄은 그저 어디 어디나 가볼까 하는 것뿐이었다. 물론 여행에서도 중요하게 생각하는 커피와 식사를 위한 리스트는 이미 차고 넘쳤지만.

남들은 한달살이도 하는 곳이다. 여유 있는 시간을 위해 가는 여행지를 나는 너무도 급하게 결정하고 떠나버렸다. 아마도 업무 스트레스와 그즈음에 겪고 있었던 많은 멘털이 털리는 일들에 어디론가 탈출하고 싶었던 절박함 때문이었을 것이다. 언젠가 여유 있게 즐기다 오리라 막연하게 마음속에 품고 있던 피난처로 도망가야 한다는 생각밖에 없었으니까.

긴 여정도 가질 수 없었다. 주말을 포함한 겨우? 3박 4일의 일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이 여행을 성공적이라 말하고 싶다. 너무 늦게 숙소에 도착한 첫날 배달음식을 시켜 먹고(알고 보니 완전 맛집이었다!) 못 알아듣는 태국 드라마를 보게 된 것도, 미처 예상치 못한 너무 뜨거운 날씨에(태국의 더위 중에서도 3월 이후는 핫서머였다) 한낮에는 썬베드에 하얀 살들을 드러낸 다른 여행자들이 일광욕을 즐기는 통에 괜히 내가 남사스러워 창을 잘 열지도 못하는 수영장뷰의 객실에서 태국맥주를 한잔하고 낮잠을 청한 것도, 바로 옆 미슐랭 레스토랑이 아닌 땡볕을 15분 걸어간 어느 한적한 동네 아저씨가 하는 쌀국숫집에서 먹은 쌀국수와 똠양꿍이 기똥차게 맛있어서 영어도 잘 통하지 않는 주인에게 엄지를 들어 올린 것도, 돌아오는 길에 카페에서 고른 태국원두를 핸드드립한 커피가 너무나 맛있었던 것도, 한 나절 동안 몇 시간을 걸어 다니며 사원만 구경하다(웬 금으로 된 탑들이 그리도 많은지!) 발견한 라이브 카페에서 무언지 모를 허브가 잔뜩 들어간 칵테일을 들이켜게 된 것도, 모두 계획에는 없었으나 너무나 행복한 일들이었다.

아니 계획하지 않아서 예상하지 못했으니 더 행복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반대로 실패했다면 계획을 세우지 않았으니 실망도 적었을 테고.

혹은 사실 너무도 지쳐있어서 작은 행운과 우연에도 너무 행복했는지도 모를 일이다.


글쎄 다음 여행에는 다시 J로 돌아갈 것만 같은 예감이 들지만(계획하지 않아 후회한 것들도 있고, 무계획이 주는 불안함이 당연히 있었으므로-아직 J이 입니다.), 혹시 계획하지 않은 대로 흘러간다고 해도 예전만큼 불안하지는 않을 것 같다.

뭐랄까 이제 P의 행복을 조금은 알아버렸달까? 하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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