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비자림
여행할 때 날씨 운이 좋은 편이다. 비가 오는 날을 피해서 다니거나 비가 온다는 예보가 있어도 이동 중이거나 숙소에 도착했을 때 비가 와서 비를 거의 맞지 않고 다니는 편이다. 워낙 비 맞는 걸 싫어해서 학창 시절 내내 작은 우산을 가방에 넣어 다녔고 차에도 평소 2개 정도의 우산을 가지고 다니는 나로서는 참으로 유용한 행운이다.
엄마와 제주도에 간 것은 처음이지만 제주여행은 처음이 아니었다.
그전에 왔던 여러 번의 제주여행은 사실 기억에 남는 것이 별로 없었다. 수학여행하듯이 차를 타고 내리기를 반복하면서 사진만은 남기겠다는 의욕에 불타 다니다가 나중에는 차에서 내리기도 거부할 만큼 피곤했던 여행이었다. 여행을 계획했던 이들은 나름 짧은 시간 안에 많은 것들을 보게 하려 스케줄은 짠 것이지만 나에게는 그저 사진만 살아남은 힘들었던 여행으로 기억된다.
엄마와 하는 제주 여행은 그렇게 하고 싶지 않았다. 느지막이 일어나 바깥의 귤밭 풍경을 보며 동네에서 아침을 먹고,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오름도 올라가 보고, 숲에도 가보고 천천히 주변을 즐기는 여행을 해 보고 싶었다. 물론 이젠 연세가 드셔서 장시간 이동이 힘드신 엄마의 상태도 고려해야 했다.
뜻밖에 엄마는 오름도, 숲을 산책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하셨다. 5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얘기하실 만큼.
비자림 숲을 가기로 한 날은 아침부터 흐렸고 비 예보가 있었다.
날씨 때문에 무리가 될까 망설이는 나에게 엄마는 당신은 괜찮을 것 같다며 비 오는 날 또 언제 숲길을 걸어 보겠냐 하시며 오히려 길을 나서자 하셨다.
입구에 들어서자 내리는 빗방울에 다시 매표소 근처 매점으로 가서 비옷을 사 왔다. 엄마는 핑크색, 나는 노란색. 비옷을 입은 서로의 모습을 보며 우리는 소녀처럼 깔깔거리며 신이 났다.
비가 와서인지 조금 이른 아침이어서 그런지 사람들이 별로 없었다.
빗소리를 들으며 비자림 숲을 천천히 발맞추어 걷는다. 오늘 아침식사 별로더라, 점심은 뭘 먹을까, 조카들을 데려왔으면 좋았을 텐데, 비자나무 씨앗이 구충제인 거 알아? 쉼 없이 수다를 떨면서.
중간에 서서 찍은 셀카에는 비옷을 입고 이마까지 내려온 모자를 올리며 웃는 엄마의 귀여운 모습이 있다.
안개가 내린 듯 뿌옇게 보이는 숲길에 더 또렷해진 듯한 초록나무에 방울방울 맺혀있는 빗방울이 너무나 아름답다.
그리 어렵지 않았던 숲길을 산책하고 나오니 비는 어느새 그쳐 있었다.
분명 들어갈 땐 뜨끈한 고기 국수를 먹어야지 했는데, 나와서는 둘 다 마음이 바뀌었다.
엄마가 드시고 싶어 하시는 전복 솥밥 집을 찾아갔는데 대기 인원이 벌써 장난이 아니다.
먹는 거 앞에 줄 서기를 정말 싫어하는 성격인데 엄마가 꼭 드시고 싶어 해서 온몸을 비비 꼬며 기다렸지만 둘 다 정말 맛있게 먹었다. 평소 먹는 양보다도 훨씬 많이.
그날 저녁 잠자리에 들어 밤이 늦도록 두런두런 또 이런저런 얘기를 한다.
비가 와서 더 좋았던 것 같다고. 더 이뻤던 것 같다고. 생각보다 힘들지 않더라 하고. 비옷을 입을 일이 또 있을까 하고.
엄마랑 함께여서 더 좋았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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