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마이크 잡는 일을 좋아한다. 평소에는 말이 없어서 조용한 줄로만 알았던 사람이 마이크 앞에서 전혀 다른 사람이 되는 걸 보고 주변 사람들은 항상 신기해했다. 라디오 리포터로 처음 방송을 하던 날, 같이 방송을 했던 아나운서 부장님은 “넌 처음인데 어쩜 긴장을 하나도 안 하니. 방송 몇 년 한 사람 같다”고 말씀하셨다.
목소리 좋다는 소리 하나만 믿고 성우란 직업에 관심을 갖게 됐을 땐, 기름기 쏙 뺀 고기는 담백하기라도 하지. 감정을 쏙 뺀 내 연기는 씹을수록 질겨져서 도저히 목으로 넘길 수 없는 퍽퍽한 고기 같았다. 하지만 수줍음을 떨치고 얼굴에 철판을 깔았다. 잘하고 싶었다. 부끄러워하다가도 마이크 앞에서는 생활력 강한 아줌마가 됐다가, 애니메이션 속 여전사도 됐다가, 다섯 살 남자아이도 됐다.
마이크 앞에서는 내가 그렇게 딴 사람이 되는 것 같아 좋았다. 그 순간만큼은 소심하고 부끄럼 많은 내가 사라지고 자신감 있고 당당한 나로 새로 태어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좋아한다고 해서 그 일을 직업으로 삼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었다. 좋아하는 일을 남들보다 잘하기까지 한다면야 별 무리 없이 직업으로 연결할 수 있겠지만, 문제는 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 아닐 때다.
마이크 앞에 서면 잘한다는 소리를 곧잘 들었지만 방송사 공채에 합격할 정도는 아니었다. 아나운서가 되고 싶었지만 수천 대 일의 경쟁률을 뚫고 합격할 만한 실력은 못 됐다. 성우 역시 마찬가지였다. 마이크만은 꼭 잡고 싶어서 뜬금없이 방송 기자 시험에도 몇 번 기웃거려봤지만 결국 내 길이 아니라는 결론뿐이었다.
현실적으로 잘하는 일이 직업이 될 가능성이 더 크다. 좋아하는 일을 선택하기에는 넘어야 할 산들이 너무 많기 때문이다. 과연 그 회사에서 나를 뽑아 줄까? 먹고 살 만큼 돈을 벌 수 있을까? 안정적인 일이 아닌데 성공할 때까지 버틸 수 있을까? 나이도 많은데 언제까지 지망생에만 머물러 있어야 할까? 좋아하는 일에 대한 열망 때문에 좌절이 반복되고 괴로울 때, 사람들은 결국 하고 싶은 일을 포기하고 할 수 있는 일을 한다. 나 역시 그랬다. “할 만큼 했어. 깨끗이 접자.” 더는 마이크를 잡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나를 필요로 하는 곳에서 다른 일을 시작했다. 포기하면 더는 좌절감을 겪을 필요도 없고 그럭저럭 현실에 만족하며 살게 될 줄 알았다.
그런데 웬걸. 다른 일을 직업삼아 하고 있지만, 돌고 돌아 요즘도 가끔씩 마이크를 잡는다. 방송국이 아니라도 목소리를 필요로 하는 곳은 생각보다 많았다. 크고 작은 광고나 오디오북 녹음 일에 목소리를 보태며 용돈벌이를 하기도 했고, 시각 장애인을 위한 음성 콘텐츠 제작을 위한 목소리 기부에 참여하기도 했고, 관심 있는 분야의 팟캐스트 진행도 하고 있다.
직업적으로 욕심내는 대신, 좋아하면서 내가 할 수 있는 일을 찾아 즐기기로 했다. 잘해야만 하는 일들에 치이다가 지친 마음을 기댈 곳을 찾은 것이다. 사회 분위기가 예전과 달라졌다. 용기를 갖고 '좋아하는 일'을 자기 업(業)으로 만들어 나답게 살라고 부추기거나, 뭘 좋아하는지 모르겠다고 하면 여태 그걸 모르면 어떻게 하냐고 다그친다. 좋아하는 일이지만 잘하지는 못한다고 하면 열정과 노력이 부족한 거라고 몰아세운다.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좋아하는 일만 하고 사는 사람이 어디 있냐며 철 좀 들라고 해 놓고 왜 갑자기 유난들인지.
나는 좋아하는 일이 잘하는 일이 아닐 때 겪어야 하는 고통을 잘 안다. 그래서 무작정 좋아하는 일이 직업이 되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대신 어떤 일을 직업으로 삼든, 좋아하는 일만은 어떻게든 손에서 놓지 않았으면 좋겠다. 꼭 직업이 아니더라도 그 일을 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으니까. 신기하게도 좋아하는 일을 하다 보면 삶의 긴장이 풀린다. 뻣뻣하게 경직되어 있던 삶이 말랑말랑 부드러워진다. 직업이 아니라도 좋아하는 일을 가치 있게 다뤄야 하는 이유다.
돈벌이도 안 되고, 사람들의 인정을 받지 못하고, 결과가 좋지 않아도 정말 하고 싶은 일이 있다면 조금씩, 꾸준히, 충분히 즐기는 시간을 쌓아 보자. 그렇게 삶이 말랑말랑해지면 뻣뻣할 땐 보이지 않던 것들이 눈에 들어올 거다. 나는 그 덕분에 인생을 나아갈 새로운 방향을 찾았다. 꽁꽁 묶여 있는 것만 같았던, 어떤 삶을 살고 싶은지에 대한 고민이 풀려 가고 있다.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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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19(월) 오전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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