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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학생 때 들고 다니던 가방은 무게가 돌덩이 같았다. 거의 모든 교과서를 책가방에 넣고 다닌 탓이었다. 학교 사물함에라도 놓고 다니면 될 일인데, 혹시 집에 가서 공부를 하지 않을까 싶어 이것저것 다 챙겨 넣었으니 가방이 가벼울 리가 없었다. 결국 쓸데없는 일이었다. 그 많은 책이 다 필요하지도 않았고, 집에 와서도 공부는 무슨. 가방을 내려놓자마자 침대 위에 쓰러지는 날이 더 많았는걸. 그런데도 나는 학창 시절 내내 가방의 무게에 짓눌려 집과 학교를 오갔다. 덕분에 얻은 건 좋은 성적, 아니 그랬으면 억울하지나 않지. 고질적인 어깨 결림을 얻었다.


다행히 교복을 벗고 무거운 책가방으로부터 해방된 지도 어언 10년이 더 지났다. 책가방을 메지 않아도 되니 어깨가 날아갈 듯 가벼워져야 정상인데 전혀 그렇지가 않다.  책가방 대신, 어깨에 삶의 무게를 얹었다. 맡고 있는 역할에 충실해야 해서, 불안한 현실에 대비해야만 해서, 하고 싶다기보다 해야 하는 것들을 잔뜩 떠안고 있어서, 짊어져야만 하는 것들의 무게가 만만치 않다.


학창 시절엔 힘들다고 말하면 종종 친구들이 가방에 든 걸 나눠서 들어 주곤 했다. 어른이 된 지금은 삶이 힘들다고 말하면 짊어진 짐의 무게를 비교 당한다. “너만 힘든 게 아니야. 나도 힘들어”라는 말 뒤에는 상대적으로 내 삶의 무게를 가벼이 취급하는 말들이 따라붙는다. 그래도 넌 결혼이라도 했잖아, 넌 취업이라도 했잖아, 넌 아는 사람이라도 많잖아, 넌 날씬하기라도 하잖아 등등. 그래서일까. 언제부턴가 나는 어깨가 무겁다는 말을 사람들 앞에서 잘 꺼내지 않게 됐다. 말해 봤자 누군가는 자신의 무게와 비교할 게 뻔하고, 다른 누군가는 짐을 대신 덜어 줄 수 없어 불편한 마음을 갖기도 하니까.



고래는 물고기처럼 생겼지만 어류가 아닌 포유류다. 고래는 우리와 마찬가지로 폐로 호흡하기 때문에 물 밖에서도 충분히 숨은 쉴 수 있다. 그럼에도 육지로 나와서는 살 수가 없다. 바로 엄청난 무게 때문이다. 지구상에서 가장 거대한 생명체로 손꼽히는 대왕고래는 평균 무게가 120톤, 심장 하나만 해도 작은 자동차 한 대 크기다. 더 놀라운 건 어마어마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바닷속에서 헤엄치는 속도는 굉장히 빠르다는 것.


바닷속에서 고래의 거대한 무게가 문제가 되지 않는 건, 물체가 물이나 공기 중에 뜰 수 있게 해 주는 부력 덕분이다. 하지만 바다 밖으로 나오면 부력은 사라지고, 중력을 받은 고래의 몸무게는 내장을 짓누른다. 육지로 올라온 고래는 결국 자기 무게를 감당하지 못해 압사당하고 마는 것이다. 거대한 무게에도 불구하고 자유롭고 가뿐하게 바다를 누비는 고래처럼, 우리 삶에도 부력이 필요하지 않을까.




우리에게도 각자가 짊어진 삶의 무게를 잊고 가벼워질 순간이 있어야 한다.


가끔, 삶에 짓눌린 나를 떠받쳐 줄 무언가에 기대야 한다. 다행히 우리는 고래가 아니라서 물 밖에서도 부력을 받을 수 있다. 삶의 무게가 아무리 무거워도 견딜 수 있는 힘은 소중한 것들에서 나온다. 소중한 사람, 소중한 시간, 소중한 물건, 소중한 가치 등이 부력이 되어 어깨를 짓누르는 무게로부터 가벼워지는 순간을 만들어 준다.


사람은 자기가 감당할 수 있는 만큼의 무게를 진다고 하지만 그것도 그렇게 쉽게 장담할 수 없다. 책가방을 쌀 때처럼 무게를 늘리고 줄이는 걸 매 순간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또 언제 어떤 일로 인해 상상도 못 한 무게가 삶에 얹어질 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문제는,  많은 사람이 삶의 무게에 짓눌릴 때 보통 조금이라도 무게를 줄여 보려고 자기에게 소중한 것부터 먼저 내려놓는다는 것이다. 타인을 위한 것이나 책임져야 하는 것은 끝까지 짊어지면서도 나를 위한 것은 비교적 쉽게 내려놓는다. 당장은 짊어진 무게를 덜어 내는 것 같지만, 그게 곧 삶의 부력을 없애는 일이라는 걸 모른다. 뭍으로 나온 고래처럼 머지않아 압사 당할지도 모르는데.




삶의 무게를 줄이려면 소중한 것들을 늘려야 한다. 어떤 환경과 말에도 흔들리지 않고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가장 먼저 지켜야 한다.


일본의 소설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자신의 에세이 『랑겔한스섬의 오후』에서 작지만 소중한 행복을 말한다. ‘갓 구운 따끈한 빵을 손으로 찢어 먹는 것’, ‘반듯하게 접어 넣은 속옷이 서랍 안에 가득 쌓여 있는 것’, ‘오후 햇빛에 나뭇잎 그림자가 진 것을 바라보며 브람스의 실내악을 듣는 것’, ‘면 냄새가 풍기는 새로 산 흰 셔츠를 머리에서부터 뒤집어쓰는 것’. 이것들은 아마 그의 삶의 무게를 줄여 주는 부력이 되었을 것이다.


나도 삶이 무겁게 느껴질 땐 나에게 사소하면서도 소중한 것들에 집중한다.


밤늦게 조명 하나 켜 놓고 라디오 들으며 맥주 마시기.

책 읽다 발견한 마음에 드는 문장 필사하기.

귀여운 캐릭터 이모티콘 구입하기.

친구랑 맛집 찾아다니며 배 터지게 먹기.

매운 음식이 당길 때 떡볶이 배달시켜 먹기.

하천 따라 자전거 타기.

해변에 앉아 바다 보며 멍하니 있기.

길 가다 가판대에서 예쁜 귀걸이 사기.

혼자 노래 틀어 놓고 따라 부르기.


고래가 바닷속에서 자기 무게를 잊고 자유롭게 누비는 것처럼, 우리도 각자가 소중하게 생각하는 것으로부터 조금 더 가볍고 유연하게 살아갈 힘을 얻는다. 삶의 무게를 이겨내며 살아간다.




어떤 무거운 짐이 내 삶에 얹어진다 해도

나는 계속해서 작지만 소중한 행복들을 늘려 갈 것이다.


소소한 것들을 하찮은 것이라 말하는 사람들에게 굴하지 않고, 나에게 소중한 것들을 꿋꿋하게 지킬 것이다. 그리고 다른 사람들과 자신의 삶의 부력이 무엇인지 이야기 나누는 기회가 많아지면 좋겠다. 그렇게 우리의 삶이 가뿐해지는 순간들이 자주 있으면 좋겠다.



[신간 에세이]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출간 기념 연재였습니다.


다음글,

<삶의 무게를 줄이는 방법> 5화. 큰일 하는 사람은 아닐지라도

11/22(목)에 연재됩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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