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 그 후 (9)

도시락

by 도미니

유부초밥, 치킨너겟, 미니핫도그.
찬합에 차곡차곡 아기주먹만한 음식들을 넣다보면 기분도 저절로 좋아진다. 도시락을 싸는 것은 참 정갈한 일이다. 분주하게 움직이며 간단한 음식들을 조리하고, 약간 식은 후에 그야말로 차곡차곡 보기 좋게 담는다.

관건은 여백이 없도록 하는 것. 조금의 틈이라도 있으면 옮기는 과정에서 흐트러져 버리니까. 빽빽하게, 그러나 너무 들어차보이는 것이 아니라 소담스럽게. 조심조심 젓가락을 움직이다보면,

왠지 아이와만 함께하는 다소 어긋난 내 생활도

이렇게 조리있게 그리고 보기좋게 잘 운영하고 있다는 뿌둣함이 느껴지기도 한다.

운동회 날이었다.

작년에 그렇게 피하고 싶었지만 어렵게 어렵게 갔던 운동회와는 달리, 올해는 그저 잘 받아들였다.

사실 올해 운동회 소식을 들었을 때에는,

뭐야.. 토요일이잖아.. 토요일 오전은 새벽예배도 가야하고, 찬양 연습도 해야하는데... 작년에도 보니까 아이가 아파서 안 온 집도 더러 있고.. 그래도 의외로 서로 운동회 얘기는 안하는 것 같으니까... 올해는 그냥 막판에 안가도 괜찮겠다..

생각했었다.

일찌감치 먹었던 마음은 또 바쁜 일상에 치여 어디론가 날아가버린, 운동회를 2주 정도 앞둔 어느 날,

저녁 자리에서 아이가 반짝거리는 눈으로 말을 꺼낸다.

엄마, 나 달리기 나간다!

저녁은 거의 아이만 먹는다. 나는 늘, 아이 몫의, 성인 반공기 정도 되는 양을 흰쌀밥을 새로 지어 고기나 소세지 같은 단백질 반찬을 함께 주고는

돌아서서 나물이나 샐러드를 준비하기에 바쁘다.

오늘은 냉장고 야채박스 구석에서 내내 거슬리던 브로콜리를 꺼내 서둘러 데치는 순간 귀에 꽂히는 단어.

...달리기?! 운동회날..?

응! 엄마 나 계주 선수래! 나랑 주언이랑 나가기로 했어! 근데 나는 달리기를 잘하는데 주언이는 그렇게 잘하는 것 같진 않긴 해~

밥도 잘 안 먹는 애가 입술 위에 하얀 밥알을 하나 붙여놓고 신나게 이야기를 하는 순간,

내 계획 따위는 힘이 없다. 사람 일이 항상 이렇다. 미리 고민할 필요가 없었던 일이다. 아이가 계주를 나간댄다 ㅋㅋㅋㅋㅋㅋㅋㅋ그럼 가야지 운동회....

ㅠㅠ 그냥 가는 거지 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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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어처구니없는 계기로 고민을 자르고 참석한 운동회는, 차곡차곡 도시락은 먹을 새도 없었다. 예년과 달리 토요일에 진행되고 업체도 바뀌었다. 몰아치는 사회자 덕분에 조금도 쉬지 못하고 즐거움을 강요 당하며 -_- 바통을 성화봉송하듯이 들고 따글따글 굴러들어온 아이 계주가 끝나자마자 홀가분한 마음으로 서둘러 짐을 추리고 아이를 들고 뛰어 차에 실었다.

토요일은 영어수업이 있는 날. 게다가 오늘은 아빠도 만나야 하는 둘째주 토요일이다. 이 정도 되면 학원을 하루 빠져도 좋겠지만, 아이아빠가 날 차단해서 소통이 전혀 되지 않으니 그럴수가 없었다.

아가, 우리 운동회 달리기 1등했으니, 조금 늦겠지만 영어학원도 가고, 아빠도 만나러 가자. 엄마가 이따 만나면 우리 아가 좋아하는 교촌치킨 사줄게 알겠지?

올림픽 공원에서 부터 광화문까지 막히는 도로를 뚫고 수업시작 시간에서 20분이나 지나서야 도착을 했다. 차에서 내내 자다 깬 식탐없는 아이는 단호히 아무것도 안 먹겠다고 해서 그냥 학원으로 달래 들여보내는 수밖에 없었다.

배고플텐데, 아이라서 배고픈 건 모르고 그냥 마냥 힘이 들고 기분이 안좋을텐데. 어떡하지.

한참을 그 자리에서 고민을 하다가 돌아서는데 익숙한 뒷모습이 보인다.

아이를 데리러 온 아이 아빠다.

나도 모르게 얼굴이 환해지며 손을 들었다. 그 사람이 반가운 것이 아니다. 고민을 하던 차에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생겨 나온 반사적인 반응이었다.

어..! 마침 잘 만났네. 오늘 말야...

그는, 손을 내저으며 돌아서 버린다.

내 반가운 몸짓은 상대의 단절로 무안함으로 바뀌어 소금기둥처럼 멈추어 섰다.

근데, 정신을 차리자. 이 거절은 무안할 일이 아니다. 어쨌든 넌 저 사람 자체가 반가웠던 게 아니다. 아이를 위해 해야할 말이 있었던 것이다. 괜찮다. 무안함 같은 것 지우고 얼른 따라가서 할 말을 하자.

아니 내가 할 말이 있어서 그래...

따라오지마.

내 얼굴 쪽으로 손가락을 세우며, 경고하듯 말하고, 축지법을 쓰듯 빠른 걸음으로 저 만치 걸어가고 있다.

사람은, 거절에 약하다. 어떤 종류이든 아무튼 거절은 상처를 남긴다. 불쾌하고 아프다. 역시나 그래서 나도 또 멈추어 섰다.

주변에 사람들이 많았다. 스토커취급을 당한 듯 챙피하고 불쾌했다. 그래서 더는 이 상황을 이어가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럴수가 없었다.

아이가 굶었다.
긴장을 했는지, 아무것도 먹지 않고 달리기도 하고 힘쓰는 줄다리기도 했다.
배가 고플 것이다.

아이의 마음이, 굶었다.
토요일에 하는 운동회는 평일에 하는 것과 차원이 달랐다. 아빠들 총출동. 아빠가 안 온 집이 없었다. 정말 한 집도 없었다.

아빠 달리기를 할 때, 스쳐 지나가던 아이의 쓸쓸함을. 친한 친구들 아빠가 친구들을 안고 앞으로 나설 때의 그 실망감을.

나는, 그가 있었어도 저렇게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고 알수 없는 짜증만 냈을 거라며 위안할 지식이라도 있었지만, 아이에게는 이렇다할 희석재료가 없었을텐데.

아이가 배가 고플 것이라는 것, 기대와는 다르게 힘든 하루였을 것이라는 것은, 어떻게든 전달해야한다. 지금 내가 어떤 취급을 받았는 지가 중요하지 않다.

이 병신아!!!

빠른 걸음으로 사라지려던 그가 멈췄다.

니 딸 오전 내내 굶었어. 굶고 운동회 갔다 왔어. 보자마자 밥부터 먹여!!!!!

나를 한번 돌아본다.

그리고 다시 돌아서 사라지는 뒷모습을 보며.

됐다. 아이를 찾자마자 밥을 먹이겠지. 그러면 됐다.

차곡차곡 싼 도시락이 조금 흐트러져도. 상관없다. 먹으면 다 똑같아.

ㅡㅡㅡㅡㅡㅡㅡㅡㅡ

돌아보면 그도 저도 서로 저런 막말을 한 적은, 없었어요.

저야 워낙 그렇다고 해도

그 역시 온갖 인격비하의 말을 했어도 욕이나 험한 말은 하지 않았습니다. 그건, 분명한 그 사람의 장점이라고 생각해요.

아무튼 저 날은 너무너무 아픈 날이었습니다.

그 길로 돌아서서 떨리는 손으로 운전대를 잡고 돌아와서, 곧장 성전으로 가 몇시간을 울었어요.

언제나 그렇듯 이제 또 괜찮습니다.

한참 전의 일이에요. ^^
오늘도 읽어주셔서. 너무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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