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시에 예정된 조정을 15분쯤에야 시작한 여자 조정위원은 믿거나 말거나 판사를 만나 우리 이야기를 하고 오느라 늦었다고 한다. 이 사건에서 도대체 재산분할할 것이 있겠느냐는 이야기를 하며 그냥 적당히 끝내란 말을 했다. 최태원 회장 이혼사건을 들먹거리며 그 사건 재판부가 내 사건을 맡을 거라며, 요즘은 여자판사들이 오히려 특유재산의 분할에 소극적이라고 줄줄이 이어가더니,
"삼천."
삼천만원으로 합의 하라는 이야기였다. 그간의 내 마음 고생이 외부에서는 이렇게 재단되는 구나. 저렇게 그야말로 재수없는 말투로, 저 여자는 다른 사람의 인생을 아주 쉽게 퉁치려고 하는 구나. 정말 불쾌하고 한동안 잊지 못할 것 같은 말투였다.
협상은 거기에서부터 시작되었다. 양측이 들락날락하고 금액이 내려갔다 올라갔다 하고. 그러는 동안 내 변호사님은 계속 팩트를 전달해주었다.
1. 조정위원은 판사가 아니니까 하는 말을 귀담아 들을 필요가 없다.
2. 합의가 안되어 재판으로 가도 이 과정은 판사에게 들어가지 않는다
3. 합의를 이끌어내기 위해 계속 이 말 저말을 하겠지만 정신을 잘 차려라.
실제로는 격하고 적나라한 표현을 썼다. 아무튼 요지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된다는 것이다.
양쪽의 변호사가 당사자들의 목줄을 잡고 있고, 당사자들은 개가 되어 으르렁 거린다. 이빨을 세게 드러낼라치면 목줄을 잡은 변호사가 진정시키지만 때로는 개주인들끼리도 싸운다. 정말, 영락없는 개싸움이다.
그는 재산분할은 물론 양육비도 절대 줄 수 없다고 했다. 변호사는 갓 로스쿨을 졸업했는지 그런 그를 제지도 하지 않고 원칙을 알려주지도 않았다. 이혼소송에 대한 지식이 전혀 없어보이는, 무식한 두명을 조정위원이 나무랐다.
"아빠, 소득이 0원이어도 양육비는 주게 되어 있어요. 그게 부모로서의 의무에요. 게다가 딸이 저렇게 엄마처럼 잘 크기를 바라는 게 아빠 마음 아니에요?"
몇번이나 덤벼서 두드려 때리고 싶었다. 저런 말도 안되는 논리를, 그동안 내가 당하고 살았다. 막무가내이며 극도로 이기적이라서 난 그 말의 뜻을 알아듣는데만도 시간과 에너지가 엄청 들었다. 그리고 항상 시간이 지나 와 정말 그런 뜻이었구나. 그 의미였구나를 알고 받아들이고 더더 화가 났었다. 항상 그런 패턴이었다.
눈앞에서, 제3자가 있음에도 그 이기적인 태도는 그대로인데 도대체 왜 저걸 저 조정위원은 저정도로 두고 있는 것일까. 그나마 저정도로 나무라주는 걸 고마워 해야하는 것일까. 혼란의 구름들이 내 곁에 짙게 드리워져 있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눈을 뜨고 멀쩡한 척 앉아 있는 것 만으로도 힘이 너무너무 들었다.
몇번이고 번갈아 가며 조정실을 들락 거렸다. 내가 나가고, 그가 나오면 우리가 들어가고. 가서 또 왠만치 하라는 잔소리를 듣고, 또 나가고. 그러다가 조정위원이 직접 구두소리를 딱딱 내며 나갔다 오기도 했다.
저 사람은 왜 발에 꼭 맞지 않는 구두를 신어서 저렇게 큰 소리를 내며 걸어다니는 걸까. 그녀의 온갖 것이 거슬리도록 피로감이 쌓일 때쯤,
타협안이 마련되었다. 구슬리기도 하고, 반협박도 해가며 나온 타협안에 결국은 내 선택만 남았다. 정말 엄청 재촉을 한다. 얼른 이대로 조정으로 끝낼 것인지 결정을 하라고 한다. 변호사님을 바라보았지만, 이 순간에 변호사는 아무것도 돕지 못한다. 사실 조정은 당사자의 몫이니 당연하다.
우선 사실 확인을 했다.
- 저 금액으로 조정을 한다는 것은 재판으로 가도 최소한 저 돈은 받을 수 있다는 이야기인거죠?
- 네 맞아요. 정확히 그런 얘기죠.
- 변호사님, 저는 돈도 중요하지만, 이기고 싶어요. 저 돈에 30만원만 더 받아도 되고 10만원을 더 받아도 되요. 재판에서 저거보다만 많이 받는다면 성공이에요..
재판으로 갈까. 말까. 여기서 끝낼까 말까.
다시 한번만 생각해보자. 그 분의 뜻을 구해보자..
눈을 감았다. 태풍이 보인다. 무섭게 휘몰아치는 태풍의 눈에 나와 아기가 있었다. 빨리, 여기서 나가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래서 눈을 뜨고 그 조정안을 받아들이겠다고 했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분위기가 돌변한다. 조정위원의 말과 손이 빨라진다. 어떻게든 이것을 완성시켜서 본인의 실적을 하나라도 더 높이겠다는 의지가 그녀의 표정에서 고스란히 드러난다.
남편 측도 만족한 표정이다. 한푼도 안주겠다더니 그 동안 사태파악을 제대로 하고 왔나. 이정도면 선방했다는 얼굴이다. 꼴도 보기 싫었다.
아니다. 이렇게 간단히 끝날 수는 없다.
난 어차피 1년은 견딜 생각을 하고 시작했잖아. 내가 얼마 받고 말고를 떠나서. 쟤를 쟤를 더 괴롭혀야 해. 난 업무를 하니까 그래도 괜찮잖아. 공부한답시고 노는 쟤는 하루 온종일 송사에 휘둘리고 휘말리며 고통스러울 수 밖에 없어. 그런 시간을 내 아픈 결혼 기간의 5분의 1은 겪게 해야하는데...!
조정위원의 검지 손가락이 독수리처럼 조정안을 쓰고 있는 도중에 고개를 들었다. 마른 침을 삼키고. 간신히 입술을 열었다.
" 저, 안하겠어요. 받아들일 수 없습니다. 재판으로 갈래요. "
내 변호사는 잡고 있던 볼펜을 집어던지며
" 네, 그럽시다! 정말 가관이라 못 봐주겠네요!"
우리를 제외한 모두의 비난과 실망섞인 눈빛이 내리꽂힌다. 왜 이런 상황에 놓여야 하지. 난, 정말 잘못한 게 없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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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까지 대부분은 글을 쓰면서도 오히려 기운을 얻었는데, 지금부터는 저도 많이 소진이 되었는지, 쓰는 것도 힘이 들고 괴롭고 그렇습니다. 그렇더라도 이렇게 남기는 것이 저에게도 결국은 좋은 일이라고 생각하며 며칠에 걸쳐 썼어요.
누군가에게 말을 하고 싶은데, 어떤 말을 어디서부터 시작해야할 지도 모르겠고. 막상 털어내봐도 상대방의 반응이 제 마음에 차지 않아 오히려 마음이 상하고, 마음 상해하는 제자신이 또 어이없어서 실망하고,
물속에 가라앉아 숨도 못쉬는 것 같이 매일이 괜찮지가 않아요. 하지만 지금 이런 중에도 주님이 성실히 일하고 계심을 믿습니다. 믿는 것 밖에는 달리 방법도 없는 걸요.
퉁퉁 부은 눈으로 맞이하는 날들은 언제나 끝나게 될까요. 읽어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관심 주시는 것 만으로도 정말 큰 힘이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