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23)

TV와 예물

by 도미니



아기가 무사히 돌아오고 다시 일주일이 지나 두번째 면접교섭날이 왔다. 아기를 보낼 때 들려보내야 할 짐을 생각하며 연말 계획을 짰다.


조정절차에서 아기의 면접교섭과 내 짐을 빼오는 날을 잡았었다. 몇번이고 못 가져 가게 하려고 어깃장 놓는 남편을 조정위원이 뭐라고 해서 간신히 잡은 날이니 꼭 아기에게 엔칸토를 틀어줄 TV와 서랍장 하나, 그리고 나와 아기의 책은 가져와야 한다.


연가가 이틀이 남았다. 다음 주 월요일에 짐을 가지러 가야하는데 월화 연가를 쓰고, 친정부모님과의 여행계획도 세우려니 아무리 봐도 월요일이 날이 나오질 않는다. 일월 여행을 가고 화요일에 찾으러 가는 게 좋겠는데... 남편은 일을 안해서 수입이 없으니 양육비도 줄 수 없다고 우기는 걸 보면 정말 군무원 시험마저 떨어진 모양이었다. 월요일이나 화요일이나 그에겐 상관이 없다. 어느 날이건 하루 집을 비워주면 되는 일이다.


고민을 하다가, 짐 빼는 날짜를 화요일로 바꿔달라고 문자를 보내고, 업무를 하고 있는데 답이 왔다.


- 집안물건만 건드리지 않으면 얼마든지 협조할게"


(집안물건만... 건드리지 않으면..?)


걱정하지마. 조정위원앞에서 이야기한 TV랑 서랍장 외엔 모두 나랑 아기 물건이야.


- 두고 나간이상 TV도 가져갈 수 없어. 니 개인 짐만 가져


조정 과정에서 이야기된 것이잖아? 지금 그거 안지키겠다는 거야?


- 조정에서 결정된 것은 아무것도 없어


....... 개싸움이 다시 시작되었다.


요약하자면 아무것도 건드리지 말고 작은 짐만 가져가라는 것이다. 하지만 분명히 2주안에 안가져가면 TV와 커피머신을 부숴버리겠다고 한 문자를 내가 가지고 있다. 자기는 보지도 않는다며 으름장을 놓았었다. 그래놓고 이제 와서 모든 것이, 나에게 득이 되는 정말 모든 것이 아까운 것이다.


TV는 꽤 큰 화면이다. 60인치 대형화면이 벽의 3분의 1은 차지해서 영화보기 참 좋았다. 나야 공부에 육아에 치여 제대로 본 적도 없지만 우리 아기가 그것으로 엔칸토와 겨울왕국을 보았다. 아기 영어공부를 위해서라도, 그리고 우리에게 미칠 충격을 최소화하기 위해 익숙한 물건들이 필요하다. 가져올 수 있는 것. 아기가 좋아했던 것은 다 가져올거야..... 사실 고백하건대 이것보다 더 큰 이유는,


혼수로 저 TV를 해간 것인데.. 신혼 초에 남편이 어머님 집의 TV와 바꾸겠다고 했었다. 니가 우리 어머니의 가전을 당연히 바꿔드렸어야 하는 데 안했으니까 이 TV를 가져가고, 어머님 집의 오래된 tv를 가져오겠다고. 했었다.


양보할 수 없다.


마음을 굳게 먹고 싸우는데, 또 하나의 폭탄이 터진다.


- 예물도 돌려줬으면 좋겠어. 나도 시계 줄게.


.... 예물. 판례상 결혼 기간이 지속되었다면 예물은 분할 대상이 아니다. 갖고 싶은 생각도 없지만 돌려줄 생각도 없다. 저 @@가 무슨 생각을 하는 지 뻔히 알기 때문이다.


고시생 신분으로 언니가 준 1500만원이 내 결혼자금의 전부라서, 결혼할 때 분명히 예물은 안하겠다고 했었다. 내가 가진 돈에서 반지만 사겠다고 했는데, 어느날 어머님, 이모님, 남편이 나를 불러내더니 당신들이 예물을 샀다며 동대문을 데려갔다. 굳이 굳이 필요없다는 목걸이와 팔찌와 결혼반지를 다 골라놓고 껴보라고 하고선 그 자리에서 흥정을 해서 산 것이. 큐빅이 박힌 14k 장신구들이 예물이었다.


분수에 맞지 않게 다이아반지를 바란 것이 아니다. 내가 고르고 싶었다. 예산을 최대한 아끼며 작은 실반지라도 좋았다. 그런 것을 본인들 마음대로 틀어 굳이 구색을 맞춰놓고 남편의 시계도 사주라며 생색을 내서 또 끼지도 않는 남편의 시계도 샀었다.


그것들을 교환하자는 저 대단한 발상에 정말 질려버렸다.


변호사에게 전화하니, 그의 말대로 조정에서 결정된 것은 없기에 지키지 않아도 방법은 없다고 한다. '조정과정에서 결정된 것은 없어' 가 바로 이런 뜻이었구나. 다 알아보고, 본인에게 불리할 것이 없다고 생각하니 저렇게 나오는 거구나. 다시 한번 치가 떨렸다.


말을 바꾸는 게 도대체 몇번째인지 모른다.

1. 이혼하자고 하니 문을 잠갔다가,

2. 다시 모두 부수기 전에 다 가져가라고 윽박을 지르다가.

3. 합의 이혼을 하자며 충분히 필요한 것을 챙기라고 했다가,

4. 잘못했다며 이혼을 없던 일로 해달라고 했다가,

- 실제로 이 때 짐을 가지러 집에 가보니 장문의 꾹꾹 눌러쓴 반성문 같은 편지를 써놓았었다. 너무 싫어 손도 대지 않고 나왔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증거수집 차원에서 뜯어놓을 걸 그랬다는 생각도 든다. 나는 평생 너와 아이 옆을 지킬거야. 라는 말은 역시나, 타인의 절대적인 희생을 전제로 한 말이었겠지. 시간이 지나고 저렇게 순식간에 사라지는 말이나 뱉는 사람이라니, 정이 더 떨어졌었다.

5. 추석까지 기다렸는데 니가 오지 않았다며 다시 문을 잠궈버렸다.

6. 조정에서 짐을 가져가게 하기로 해놓고는

7. 결정된 것이 없다는 말로 모든 것을 다시 엎고 예물까지 돌려달라는 말을 뻔뻔스럽게 하고 있다.


가만 생각해보자. 우리는 내일 다시 봐야하는데, 아이를 보내기 위해 얼굴을 봐야하는데. 이렇게 개싸움을 또 하고 내일 멀쩡히 얼굴을 볼 수는 있을까. 아이 앞에서 웃을 수 있을까. 나에게 저 인간에게 그럴 수 있는 능력이 있을까.


왜. 왜. 왜. 또 이런 거지같은 상황을 맞이해야 하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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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가 잘한 일은 그 알량한 예물을 들고 나온 것이고, 잘 못한 일은 TV를 상황이 될 때 재빨리 이전하지 않은 것. 이라고 생각합니다.


확보하셔야 하는 물건들은, 꼭 미리 잘 챙기시길, 부탁드려요.


오늘도 읽어주시고, 공감해주셔서 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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