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28)

사전처분

by 도미니


별 일 없이 시간은 흐른다. 엄청 엄청 힘들 것이라고 했는데, 사실 이런 휴지기가 꽤 되고 또 길기 때문에 이런 시기에는 별 달리 생각이 나지도 않는다. 그래서 살만하다. 아니, 이러다가 갑자기 휘몰아치면 정신이 급격히 사라져서 그래서 더 힘든 것인지도 모르겠다.

치과에 가기 위해, 오늘은 3시간 일찍 회사를 나왔다.


실패하는 고시생이었던 시절, 유리멘탈인 나는 여러가지 스트레스를 견디지 못해 자다 일어나서 먹는 버릇이 생겼었다. 새벽에 일어나 뭘 입에 넣는데, 그게 기억이 날 때가 있고 안 날 때가 있었다.


신경쓰지 않아도 튼튼했던 치아는 그런 시간이 1년 넘게 가면서 치과진료때마다 충치가 발견되는 지경에 이르렀고, 결혼 후 발견한 충치 치료 때마다 남편은 본인이, 정확히는 어머니가 치료비를 부담할까봐 싫어하는 티를 꽤 열심히도 냈다. (실제로 그의 돈으로 하적은 없었다)

경제적인 면은 차치하고, 내가 가진 상처가 상대에게 용납되지 않을 수도 있다는 사실이 참 놀라웠다. 그게 그의 최선이었다는 사실도 놀라웠다. 지금 생각하면 본인이 어머님께 면목이 없는 것을, 만만한 나에게 그렇게 풀어댔구나 싶긴 하지만. 그렇다해도, 아들이 어머님 돈 쓰는 것은 당연하고 자신의 아내가 본인에게 붙어(?) 사는 것은 그렇게 마음에 안드는 것도, 감히 그러면서 나를 세상 누구보다 사랑한다고 말한 것도. 용서도, 이해도 되지 않는다.

도대체 지난 슬펐던 흔적은 언제쯤 없어지는 걸까. 이번 치료가 끝나면 또 다른 치아 차례가 올텐데. 앞으로 난, 부모님을 모시고, 아이를 키우며, 내 치과치료비까지는 간신히 댈 수는 있을까. 내가 정말 날 먹여살릴 수는 있겠지...?


어지러운 마음으로 치료를 받고 나왔는데 이마에 꽂히는 햇빛이 눈부셔서, 어딘가 가고 싶었다.


일찍 찾으려던 아기는 그냥 평소대로 6시에 찾고.... 그동안 가보고 싶던, 블로그로만 알던 이웃이 열었다는 카페에 가보기로. 과감히 마음을 먹었다.

엄마도 혼자 있을 시간이 필요하다는 명분은, 아기를 늦게 찾는 죄책감를 지우기엔 한참 부족하다. 환승역에서 고민을 백만번 하고, 그래, 거기서 과자를 사서 아기랑 나눠먹자. 곰돌이 과자도, 사람 얼굴이 그려진 과자도 좋아할거야. 커피 한잔만 마시고 30분만 있다오자. 애써 애써 겨우 겨우 방향을 틀어 카페에 도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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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담한 카페의 자랑인 창 앞의 큰 벚꽃나무는 아직 꽃이 피지 않았다. 사진으로만 나를 보다 실물을 보고 깜짝 놀란 지인에게 어색하지만 반가운 인사를 하고. 나무가 잘 보이는 창가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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걱정이 많을 땐, 나무에 꽃잎을 하나씩 붙여본다. 창백한 벚꽃잎을 하나, 또 하나. 내 마음의 복잡함을 담아 나무에 붙인다. 조금 더 괴로운 마음은 살짝 진한 분홍으로. 하나씩 덜어내어 붙이다 보면, 어느새 꽃잎이 흐드러지는 나무 한그루가, 바람결에 편안하게 흔들리고 있었다.

'괜찮아. 괜찮아 정말. 정말 괜찮아. 마음놔도 좋아'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크림이 올려진 연한 단맛의 커피를 마시고, 처음 만났지만 어제도 만난 것 같았던 온라인 친구와 이야기를 나누느라 한시간 가까이를 있다가 서둘러 내 마음과 약속한 과자를 잔뜩 사서 나왔다.

집으로 가는 길을 찾기 위해 켠 전화기에는 사전처분이 내려졌다는 변호사의 문자가 와 있었다.

임시양육자는 나.

매달 임시 양육비 50만원.

매주 토요일과 명절 전날 면접교섭을 행할 것.


좋아해야 하나.. 걱정을 해야하나..

어쨌든 하나 더 붙이자 벚꽃잎.

ㅡㅡㅡㅡㅡ

시간이 지나고, 사전처분은 정말 잘된 일이라고 생각하지만.. 말그대로 처분이지 상황이 정리되지는 않으니까요. 아직도 복잡 복잡한 상태입니다.

그래도, 변해가는 상황에도 적응을 하며, 또 좋은 일이 생길 거라고 믿어보는 주말이에요.

언제나처럼 위로와 응원 정말정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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