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 (36)

꽃가루

by 도미니


소송의 진행은 참 늦다. 이 지리한 기간들을 견디는 방법은 그저 잊어버리는 것이다. 잊어버리고, 다른 것들에 몰두하다 보면 간간히 가뭄에 콩나듯 변호사로부터 연락이 온다. 그래서 되도록 상황을 편하게 설정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만일 남편이 주는 양육비가 간절한 상황이라면 소송이라는 것을 잊을 수가 없다. 일어나는 일들에 촉각을 기울이게 되고, 그러면 정말 너무너무 피곤할 것이다. 남편이 욕을 하든 동굴로 숨어버리든 상관을 안 할 수 있는 시스템을 만들어야 한다. 그 방법은,

자립. 밖에는 없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매달 나오는 월급이 없었다면 이혼은 불가능했다. 설사 시작했어도 지금 이렇게 멀쩡하긴 정말 어렵다. 새삼, 아이에게 경제교육을 되도록 일찍 그리고 인격적으로 시작해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그도 나도, 그런 교육을 못 받아서 이렇게 되어버린 것일까. 그는 다행히 돈 많은 집에서 태어났고, 난 불행히 없는 집에서 태어났고.

아니 어느 쪽이 진짜 불행이고, 다행인 걸까.

임시처분이 이루어지고 아주 오랜만에 재산명시명령이 내려졌다. 앞으로 한달의 기한 안에 보유하고 있는 재산들을 적어서 내야한다.

목록이 오고 그 목록에 체크를 한 후에 보유 재산을 적으면 된다. 나같이 아아무 것도 없는 애는 사실 쉬운 일인데, 이것저것 많은 그는 꽤나 힘들겠구나 실소가 나왔다.

부지런히 목록을 작성해 본다. 재산이 없어도 시키는 대로 명시된 사이트에 들어가서 서류를 다운받고 화면을 캡쳐해서 첨부한다. 보험을 해지하면 받게되는 환급금을 적는다. 이렇게까지 적을 것이 없다는 것이 나 자신에게 몹시 씁쓸하긴 하지만, 그래도 위안이 되는 것은 고정 수입에 내 월급이 있다는 것. 이제부터라도, 남들에 비해 한참은 늦었더라도 괜찮다. 어차피 바닥이었으니까.

목록을 보내고 또 한참이 지났다.

한달이 넘어도 아무런 소식이 없어서 정신이 든 어느 날 변호사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남편은 변호사를 선임하지 않았다. 조정과정에서 선임한 변호사가 무척이나 마음에 안들었을 것이다. 둘이 싸웠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도 든다. 아무튼 세상에서 자신이 제일 잘났다고 생각하는 그의 마음에 나름 거금을 주고 선임한 변호사가 들었을 리가 없었다.

변호사는 그래서 도무지 진행이 안된다고 한다. 서류가 송달되지도 않고, 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아버리니 내 사건은 아마 밑바닥에 묻혀서 잊혀져 가고 있을 거라고 했다. 자신이 부지런히 기일지정신청도 하고, 남편의 전화번호도 재판부에 남기며 어필을 해보겠지만, 소송이 생각보다 길어질 수 있다는 이야기로 통화가 끝났다.

그래 어차피 손해볼 것도 없는데, 양육비도 받고 있고. 길어져봤자 내가 특히 나쁠 것도 없고 그냥 잘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힘들지 않은 것도 은혜니 잘 기다려 보다 마음을 먹은 어느날 변호사로부터 급한 전화가 왔다.

제가 지금 남편이 변호사 선임을 하지 않으셔서 소송 진행이 어렵다는 말씀 드렸죠? 그리고, 재산명시명령을 한달안에 이행하지 않으면 과태료 천만원을 내릴 수 있는데, 이제껏 진짜로 처분이 내려진 적이 없다는 것도 설명 드렸었죠?

밑에 작은 글씨로 적혀 있었다. 하지만 이제껏 그런 예는 없다고 한다. 그게 이혼소송에 그런 사례가 아예 없다는 것인지, 이 변호사가 맡은 사건 중에는 그런 경우가 없다는 것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업무를 위해 판례들을 다 훑어볼 테니 전자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 네 그럼요 괜찮아요 변호사님 천천히 가도 됩니다.

그런데, 이번 재판부에서 과태료 처분을 내렸어요. 아주 이례적입니다. 이런 경우는 없었어요!

-... 네? .....얼마를요?

천만원이요!

첫키스를 하면 머릿속에 종소리가 들린다고 했던가. 확신에 찬 변호사의 목소리에 머릿속에 꽃가루가 뿌려지는 것 같다.

천만원.

단 십만원도 벌벌 떨던 사람이.

지금 어떤 꼴일까.

아, 정말 처음으로 그가 보고 싶다.

ㅡㅡㅡㅡㅡ

어차피 제가 받을 돈은 아니니까요. 액수보다는 사실 자체가 기뻤습니다.

엄청 엄청 기뻐할 일이라기 보다는,

주께서 원수의 목전에서 나에게 상을 내리실 것이라


했던 시편말씀이 떠올라, 그저 상황이 잘 진행되어 가고 있음에 감사했어요.

아프고 어려운 소식들에 주님의 위로와 보상이 함께 하시길 바랍니다.

오늘도, 저에게 큰 위로와 상급이 되어 주셔서 모두들 감사드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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