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혼일기(40)

변론준비기일

by 도미니

최대한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며 시간을 보냈다.

변론준비기일에는 당사자는 참석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다. 말그대로 "준비" 기일이다. 적극적인 소송을 하기 전에 서류와 증거, 자료들을 먼저 제출하고 확인하는 날이지만 소송이 장기화되고 사건이 늘어나면서 사실 준비기일과 본 기일의 차이는 무색해졌다. 그래서 실질적으로 처음 원고와 피고의 법적인 주장이 충돌하는 날이기도 하다.

변호사는 사전에 자신은 이런 이야기를 할 것이며 덧붙이고 싶은 이야기가 없는 지 물었다.

"짐을 빼오고 싶어요. TV 가져오고 싶어요 변호사님. 짐 뺄 수 있는 날을 받아 주세요.."

몇번이나 짐을 빼오는 것에 실패했다. 더는 이야기를 꺼내고 싶지도 않아서 입에 담지도 않았었다. 중간 중간 모든 분노를 퍼붓고 네가 얼마나 형편없는 인간인지 아느냐고 지르고 싶었지만, 상처투성이의 내가 나를 붙잡았다.

말할 필요 없어. 그와 이야기를 시작하는 순간 너는 또 지옥에 빠지게 될거야. 발 빼자. 법원에 맡겨. 니가 해결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야.

달려나가고 싶은 나를 진정시키며 또 입술을 피가 나도록 깨문다. 그래도, 괜찮을 수 있었던 것은 차차 무뎌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입술이 트는 것도 참 오랜만이네.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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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일은 생각보다 수월했다.


이런저런 일들에 치여 준비기일임을 잊고 있었다. 오후 두시 변호사로부터 전화가 와서야 아! 오늘이 기일이었지 생각이 나서 서둘러 전화를 받았다.

" 지금 남편이 나와있어요. 변호사랑 같이 나왔어요. 짐 빼는 날을 정하려고 해요. 언제가 좋으신가요? 지금 이야기해야 해요"

- 지금... 말해야 하나요..? 그러면 금토일 중에 하루를 하면 좋겠는데..

" 하루를 정하고 시간을 말해주세요. 지금 빨리 못박아야 해요."

- 토요일 하루 종일은 안되는 거에요..?

" 네 피고가 시간을 정해달래요. 오후 2시 괜찮으신가요?"

- 그... 그럼 토요일 2시로 해주세요.

" 네, 그럼 토요일 2시로 하겠습니다"

사실, 저 날 짐을 다 뺄 자신이 없다. 들어가서 얼만큼의 짐을 가져올 지도 미리 봐놔야 하고, 큰 TV를 가져오려면 업체 예약을 해야할텐데, 그냥 TV 이전만 계약할 지, 아예 이사업체를 불러야 할지 결정하려면 내가 먼저 집에 가보는 시간이 필요한데.

재판부에서 그래도 짐을 빼는데 시간 말미를 이틀 정도 줄 줄 알았는데...

뭐 하나 뜻대로 되는 게 없었다. 토요일 2시에 가서 무슨 짐을 얼만큼 가져올 수 있을까. 부모님한테 같이 가자고 하면 가기야 하겠지만, 늘 딸네 집에 뭘 갖다주러나 손녀를 데리러 오던 주차장에 서있는 아빠 엄마 마음이 얼마나 무너질까.

무엇보다, 1년만에 가는 집인데. 거기 들어가서 내 정신은 온전할까. 한참은 울텐데, 그 꼴을 보일 수는 없는데. 어떡하지. 어떡하지.

막상 전화를 끊고 나니 막막하기 그지없다.

새로운 곳으로 발령이 나면, 그곳으로 이사를 가고, 아기 어린이집도 옮겨야 하는데. 아기의 적응 기간이며, 이사하는 방식이며, 생각할 것이 너무너무 많은데.

토요일은 당장 3일 후.

지금 있는 곳은 금요일까지 근무이다. 수요일 목요일 동안 내 자리를 정리하고, 금요일은 인사를 하고. 토요일은 짐을 빼고, 다시 그 짐을 집에서 두시간 걸리는 곳으로 가져가야 한다.

이사짐센터를 알아봐야 하나 당장 3일 후에도 잡을 수 있을까. 2시에 들어가서 짐을 싸면 업체는 몇시에 오라고 해야하는 거지.

눈에 눈물이 나도 모르게 고이는데, 입은 웃고 있다. 사람들과 농담을 주고 받고, 마음을 꼭꼭 숨긴다. 언제 터져버릴 지는 나도 모르겠다.

정말 하나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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떠올리니, 다시 한번 저 때로 돌아간 듯 막막하고 아픈 오늘의 마음은.

또 우리 아기발가락 만지며 달래야겠어요.

오늘도 너무너무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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