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런 저런 일들 속에서도 아기는 여전히 토요일마다 아빠를 만난다. 비록 내 결정으로 이혼을 하더라도 아기에게 주는 피해는 최소화 하고 싶었다. 아빠의 자리를 보전해야한다. 원칙을 한번 세우고 흔들리지 않아야지 다짐했었다.
토요일 면접교섭을 진행하려면 수요일까지는 나에게 연락을 주어야 한다. 처음에 또 옛날 버릇대로 전날 연락하고 지맘대로 굴길래, 사전처분에 나와있는 내용을 주지시켰었다.
피고는 면접교섭이 행해지는 날의 3일전까지 원고에게 연락을 주어야 한다.
그래야 아기에게 이번주는 아빠가 출장에서 오실 거라고 우리 아기 보러 달려오고 계신다고 미리 이야기를 해둘 수가 있고, 나도 여러가지 준비를 할 수 있다. 남이 되려고 하는 절차에서는 더욱 서로 예의를 차려야하는데, 너무도 당연하게 남자들은 그런 생각과 개념이 없어서 하나하나 알려드려야 했다.
나는 이제 너의 사람이 아니고, 그러니 니 기분대로 함부로 굴 수 있는 사람이 아니야.
준비기일의 다음 날은 수요일, 이번주 면접교섭을 진행하지 못한다는 문자가 왔다.
" 토요일인데 아침일찍 출근을 해야해. 시간을 바꾸지 못했어. 아이한테 잘 이야기해줘."
문자를 보는.순간 피가 거꾸로 솟았다.
- 면접교섭이 권리인 줄로만 알아? 출근해서 아이 못 본다고 통보하면 나는 그냥 받아들여야 해? 그래 사정을 봐줘서 그렇다고 쳐. 그럼 토요일 출근하고 집에 없네? 근데 왜 나보고 짐 가지러 2시에 오라고 했어? 내가 아침부터 가서 정리해도 되는데!!! 왜 굳이 나보고 오후에나 오라고 한거야? 그렇게 날 못 살게 굴고 싶어? 그러면 속이 시원해?!! 정말 어디까지 괴롭힐 건데. 어디까지 괴롭힐거냐고!!
" 나 요즘 너무 힘들어. 입장을 바꿔 생각해봐. 매일 두려워서 불면증에 시달려. 내 집에 누가 들어오는 거 어려운 일이야"
지금, 이 상황에서 본인의 두려움을 호소한다. 이혼하는 전 아내에게, 본인의 불면증을 호소한다. 이런 사람이다. 무슨 입장을 바꿔 생각해야하나. 지금 내가 누구를 배려해야 하나. 정말 밑도 끝도 없는 이기심에 치가 떨렸다.
- 아기를 데리고 일하는 엄마만큼 힘든 입장이 세상에 또 있을까? 원래 세상일이 다 두려워. 원래 그 정도는 다 두렵고 힘든거야. 그래도 다들 그러려니 하고, 그냥 안고 가. 원래 어른들은 다 그러고 살아. 여태 너무 편하게 살아서 당황스러운가본데, 그런 하소연 나한테 하지말고 정신과에 가서 열심히 해.
" 그날 5시쯤엔 집에 올거야. 나 있을 때 가져가"
- ??? 아니 지금 무슨 소리 하는 거야? 내가 짐을 가져오는 데 그걸 보고 있겠다고? 와, 정말 가지가지로 방해할 궁리를 하는 구나. 정말 대단하다. 그런 발상을 하는 구나. 내가 혼자 갈 것 같애? 내가 혼자 가서 그거 다 들고 올 것 같애? 우리 엄마 같이 가면 어떻게 얼굴을 보려고 그러는 거야?
" 장모님도 같이 올거야?"
- 니 말에 대답 안해. 내가 누구랑 가든 니가 알 바 아니야. 집 비워. 2시부터는 부족해. 어차피 출근하니 없잖아. 비밀번호 알려주고 집 비워!!!
" 업체가 오는 지? 친구들이랑 올건지?"
- 그걸! 내가! 왜! 말해야 하는데!!!! 넌 그냥 집을 비워! 내가 어떻게 하든 신경 꺼!!!!! 신경 끄라고!!!
" 나 잠도 잘 못자. 내 집에 낯선 사람이 들어와서 둘러본다는 상상 하면 너무 두려워"
- 니 거 털끝도 안 건드려. 재판부에 적어낸 물건들만 가져올거야. 사진 찍어 뒀다가 나중에 고소해도 좋아. 두렵단 얘기 나한테 하지마 그거 내가 들을 얘기 아냐.
한참을, 정말 말이 통하지 않는 대화를 주고 받았다. 나에게 계속 본인의 상태를 하소연 하려는 그에게, 나는 계속 집 비우라는 말만 해댔다. 이 정도였나. 이렇게까지 상식이 안 통하는 사람이었나. 지금 나는 온몸에서 피가 줄줄 흐르는 느낌인데. 해야할 일 투성이인데,
아기를 데리고 이사도 가야하고, 새 직장에 적응해야하는 싱글맘인 나에게, 본인의 우울증을 늘어놓고 있다. 본인의 마음을 봐달라고 조르는 저 모습이 황당해서 대꾸조차 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를 주고받은 끝에 그가 꺼낸 이야기는
" 너랑, 이야기라도 한번 해보려고 그러는 거야. 진짬뽕 끓여줄게. 먹고 짐 가져가."
진....짬뽕?
지금 이 마당에 얘 뭐라고 했냐 지금....
아.. 진짬뽕 이라고...?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짬뽕은 그의 추억의 음식이다. 모든 살림을 내가 하는 와중에 라면은 그가 끓였다. 특히 그가(내가 아니라) 진짬뽕을 좋아해서 라면을 먹으면 항상 그걸 끓였다.
집 나간 아내에게 들어오면 해주겠다는 것이 진짬뽕이다. 본인의 추억의 음식. 이 사람의 이기심의 끝은 어디일까. 악의가 담긴 이기심이 아니라, 그냥 그의 뇌에는 타인의 영역이 없다. 아내가 좋아하는 것을 떠올릴 만한 여유도 의지도 전혀 없다.
시어머니를 모시고 다녀오는 여행길에서도, 제대로 먹지도 자지도 못한 나에게 자신이 큰 선심을 쓰는 듯 진짬뽕을 끓여주겠다고 했었다. 나에게 뭐가 먹고 싶냐고 물어보는 적이 없다. 물어볼 생각은 아예 할 수가 없는 사람이다.
우리 아들이 세상 최고인 어머니와 어머님이 마음껏 부리는 이모님과 함께 홀홀 가볍게 조식 부페에서 느끼한 음식을 배터지게 먹었으니 매운 라면이 먹고 싶었겠지. 난 아기보고 어머님 이모님 시중 드느라 좋아하는 빵 한조각 제대로 못 먹었는데. 그런 건 보이지도 않았을 것이다.
본인의 기호가 당연히 아내도 좋아하는 것일 것이라고 좋아해야한다고 믿는, 저 자신감. 저 뻔뻔한 당연함.
이걸 어디서부터 어떻게 풀어내야 했을까.
저 상태로 살아오고 살아갈 그의 인생이 딱하고,
그리고, 그런 남편과 살았던 나도. 딱하다.
- 아니 싫어. 난 할 얘기 없어. 지금 한가롭게 이야기할 때가 아니야.
" 나 너무 힘들어. 회사 다니는 것도 너무 힘들고 혼자 있는 것도 매일이 지옥이야. 정말 너무 힘들어"
- 그래, 힘들지? 사는 게 그렇게 원래 힘든거야. 난 너랑 살 때 그보다 더 힘들었던 것 같아. 회사 그만두면 아들 사랑해 마지않는 어머니가 또 생활비 주시겠지. 거기다 말해.
원래, 이런 것일까. 사람이랑 사는 일은 원래 이런 것일까. 아닌 것 같던데. 다들 이 정도는 아닌 것 같아. 보였는데.
나는 뭘 잘못해서 이런 사람을 골랐던 걸까.
자책감과 열패감에서 벗어날 수가 없다. 이 저능아랑 이혼이 도대체 마무리 될 수나 있는 것일까....
ㅡㅡㅡㅡ
변호사인 친구에게 짐 빼는 문제를 물어봤었어요.
미안하지만 그걸 재판과정에서 다투는 사례는 보도듣도 못했다고 하더라구요.
어차피 헤어지는 상황이니 남겨지는 사람도 다 가져가라고 해버리거나, 아님 떠나는 사람이 포기하거나 하는 게 너무도 당연해서, 재판부가 개입을 하는 경우를 못 봤다네요.
그러면서 왜 짐에 집착을 하냐고 그냥 포기하고 버려버리라고 하는데... 사실 전 그게 되지 않았어요. 전에도 썼지만, 이슈가 있었던 TV는 꼭 가져오고 싶었고, 제 손때가 묻은 소중한 물건들, 아기의 기록같은 건 꼭 가져오고 싶었어요.
그걸 가져오겠다고 우기는 제가 이상한 것인지, 못 가져가게 막는 저 사람이 이상한 것인지. 왜 나는 일반적인 경우는 항상 비껴가는 것 같아서 혼란스러운 것은, 그냥 제 자의식이 과잉이라서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기로 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