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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미니 Jun 22. 2024

이혼일기(70)

비오는 주말

 이번에는 나무를 그려보세요. 어떤 모양이라도 좋아요


나무....?  


- ....저는 나무뿌리 그리는 걸 좋아했어서요. 뿌리부터.. 그려볼게요. 이렇게 기둥이 올라가고 가지가 무성히 있는데 잎이 엄청 많지는 않아서, 가지가 간간히 보이는 나무면 좋겠어요.


이 나무는 무슨 나무일까요? 어디에 있을까요?


- 제가 자란 동네에 벚꽃길이 있어요. 누군가에게 들었는데, 여의도 윤중로의 벚꽃은 이미 심긴 지 오래되어서 노쇠했지만, 저희 동네 벚꽃은 심은 지 몇년 안되어서 아직 소년인 나무라고 하더라구요.


 그런 소년에서 청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의 어린 나무였음 좋겠어요. 하지만 수종이 워낙 큰 나무라.. 가로수가 될 만큼 큰 나무에요.


네.. 그럼 이 나무는 어떤 존재이길 바랄까요..?


뜬금없이 질문에 대한 답을 고르다 눈물이 터져버렸다. 나도 참 웃기다. 이혼이야기 내내 안 울다가 왜 이런 질문에서 눈물이 나올까.


- .... 저를 지나치는 사람들이. 저를 보고 기뻤음 좋겠어요. 기억하지 않아도 좋고, 아무 것도 남지 않아도 좋으니, 그저 그 순간. 그들의 마음이 밝아지면, 좋겠어요. 그걸로 충분해요.


지겹도록 드는 생각이지만, 난 정말 그걸로 충분했다. 누구든지 나를 만나서 그가 환하게 밝아지길 바랐다. 정말 그 외에 특별한 바람은 없었다. 그래서 모든 걸, 열심히 해보려고 애를 썼었다.


.

.

.

 

조정이 결렬되어 난데없는 상담명령을 받고 두주 정도 지난 후,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와 있었다. 이미 법원의 가사조사관으로부터 상담을 받게될 것이고 상담위원이 연락을 할 것이라고 언질을 받아놓았던 터라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다.


혹시 상담위원이시냐며 먼저 문자를 보내고 약속을 잡았다. 다행히 위치는 회사에서 멀지 않은 곳이었고, 점심시간을 이용해서 다녀온다면 오고 가는 시간 30분 정도만 외출을 달면 될 듯 했다.


나는 아이를 키우고 일하는 엄마이고, 연가는 아이와 함께 써야하는 거라서. 이 상담은 무조건 나에게 맞춰서 진행되어야 한다고 우겼었다. 가까운 거리가 아니면 가지 않겠다고 말하니, 조사관도 그렇게 될 것이라고 했다. 남편분도 그렇게 말씀하셨다고 한다.


당연하지. 놀고 먹고 있는데, 못 올 곳이 어디가 있는가. 게다가 본인이 그렇게 바라마지 않던 상담인데.  


원하는 방향이 있냐는 조사관의 말에, 나는 이미 수차례의 부부상담을 받았고. 상담자체가 아무 소용이 없을 것이며, 하고 싶지 않은  억지로 하는 거라고 또 성질을 부려댔다.


 원하지 않는 절차를 중간에 끼워넣은 법원에 이렇게라도 진상을 부려야 속이 후련하겠다. 정말 이게 뭐하는 건 지 모르겠네. 이 마당에 상담이라니. 말도 안돼.


1) 조정에서 부부상담 결정이 내려지고,

2) 2주 후에 가사조사관에게서 전화가 왔으며,

3) 또 일주일 후에 상담위원에게서 연락이 와서 날을 잡았다. 상담비용은 무료. 아마 인지대에 포함되어 있을 것이다.


 그가 날 성격장애로 몰아세웠을 때, 부른 배를 하고 상담기관 몇군데를 찾아갔었다. 그 중의 하나가 가산디지털단지에 있는 곳으로 가정법원 상담위원을 겸하는 분이 하는 곳이었다. 50분 상담에 15만원이라는 너무 높은 금액이었지만 고민고민 하다 일단 갔었고. 다녀와서 그래도 잘 다녀왔다 싶었다. 일단 상담사가 직관이 뛰어나고 머리가 참 좋았다. 이야기 몇 마디만 나누어도 두뇌회전이 상당히 빨라서 내 이야기를 듣는 동시에 분석이 된다는 게 저절로 느껴졌었다.


 우리 나라의 상담들은 편차가 심하다. 아무 자질도 직관도 없는 사람이 일정시간의 수업을 듣고 손쉽게 센터를 열기도 하고, 워낙 재능이 있는 사람이 고통스럽다고 느낄 정도로 길고 강도높은 수련을 거쳐 하기도 한다. 좋은 상담자를 찾아가는 것은 정말 중요한 일이었고 - 잘못하면 역효과가 정말 커서 안 받는 게 훨씬 낫다. 그 때의 경험이 있어 그래도 가정법원 상담위원이라는 자리에 대한 신뢰는 갖고 있었다.


 그냥 이야기할 기회가 한번 더 주어졌다고 생각하자. 이런 상담 원래 1회기에 20만원은 할텐데 법원 덕에 공짜로 받을 수 있잖아.


 이렇게 애써 생각을 하며 외출 결재를 올리고,  회사를 나가 상담을 받고 온다. 사람들의 삶이란, 꼭 경사진 미끄럼틀과 닮아 있어서. 적당한 힘을 주고 있지 않으면 미끄러져 버린다. 긍정적인 생각은 애써 해야한다. 에너지를 내서 그렇개 생각하지 않으면, 모르는 사이에 주르륵 미끄러져 절망의 나락에 빠져 버린다. 한번 빠지면 다시 힘을 내어 제자리로 돌아오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다.


상담사는 내 이야기에 크게 공감을 해주었다. 법원도 이혼을 막자는 것이 아니라, 인생의 큰 결정을 하기 전에 자신들의 지난 날을 되돌아보고 자기자신에 대해 객관적으로 보는 기회를 부여하는 것이라며 상황을 설명해 주었다.


그래, 그렇게 생각하자. 모든 일이 잘 되어가고 있다. 다 잘 될거야.

.

.

.


어제 저녁부터 날이 흐리더니만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린다. 새벽부터 창밖을 보고 있자니, 오늘은 운전해서 교회로 가야하는 날인데. 걱정이 태산이 되었다.


익숙하지 않은 운전은 늘 무섭다. 막상 운전대를 잡고 앉아 주행을 시작하면 또 안정이 되긴 하지만 차선을 바꾸고 끼어들고 하면서도 이게 내가 제대로 보고 하는 것인지 모든 것이 그저 운이 좋아서 별 일이 없는 것은 아닌지 늘 불안하고, 또 실제로 가슴이 철렁하는 순간도 두어번 정도 있기는 했다.


 나름 원칙 몇가지를 세운다.


1) 차선을 바꿀 때에는 사이드미러에 보이는 차가 나를 지나쳐 가고 나서 직후가 제일 안전하다.

2) 깜빡이를 미리 켜면 언제든 틈이 생기니 마음을 놓자

3) 발은 꼭 브레이크 위에 올려놓아야 한다. 엑셀을 눌렀다 밟았다 할 때는 상관이 없지만 장기간 발을 그냥 둘 때에는 꼭 브레이크 위에 놓자.


 이런 자잘한 생각을 끊임없이 되뇌이며 잔뜩 긴장해서 빗속을 운전하는데.. 아니 요즘은 도대체 왜 이렇게 주말마다 비가 오는 거지.. 나 진짜 힘들어 죽겠네.. 하나님 제발 주말 날씨 좀 맑게 해 주세요. 저 초보운전인데 불안하지도 않으신가요.. 주절주절 불평을 늘어놓다보니, 생각하나가 머리를 스친다.


 예배를 드리겠다고 버스로 전철로 계단을 오르내리며 아이를 이고지고 다니던 1월부터 3개월동안. 단 한번도 주말에 비가 오지 않았다. 겨울이라 날이 몹시 춥기는 했어도 기상상황은 항상 괜찮았었다.


 지금이야 비가 오면 운전이 조금 겁이 나서 그렇지  아이는 뒷좌석에서 편히 자며 가지만, 그 때라면 이야기가 다르다. 비가 오는 데 아이를 안고 우산을 쓰고 들고 다니는 것은 말도 안되는 일일 것이다. 그리고 미처 예상치 못했던 그 말도 안되는 순간은 일어난 적이 없다. 그걸 이제야. 깨달았다.


 하나님. 고맙습니다.


 도로의 비는 그쳤는데, 이제는 얼굴에 눈물이 비처럼 내린다. 시간이 어떻게 지나갔는 지 모르겠다. 그런데 그 너덜너덜한 시간들을 지나며 쓸모없다고 남편과 스스로로부터 조롱당하던 내가, 이제 아기도 있고, 직장도 있고 월급도 받는데다가 운전까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었다. 아직 서툴어도, 내 앞의 도로는 뻗어있고, 어디로 가야할 지 알고 있으며. 열심히 나아가고 있다.



ㅡㅡㅡ


여지없이 비가 오는 토요일.


아마 주님은 제가 아이를 업고 다니던 때 참으셨던 비를 몰아 내리시는 걸까요.


오늘도 또 감사합니다.


새로운 슬픔이 있으면 또 새로운 기쁨도 오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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