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에게 아빠에 대한 부정적인 이야기는 절대로 하지 않았다. 아빠는 우리 00이를 너무너무 사랑하시는데 출장을 가셔서 못 오시는 거고, 엄마가 일을 해야해서 엄마랑 우리 애기만 같이 산다는 이야기는 이미 짜놓은 대본이다.
아이가 아빠가 보고싶다고 하면, 맞아 엄마도 아빠가 보고싶어.. 아이가 아빠가 잘생겼다고 하면, 맞아 아빠는 엄청 잘생겼지. 아이의 머릿속에 있는 아빠는 언제나 멋지고 가정적이어야 했다. 엄마를 함부로 대하고, 게으르고 나태한 사람으로 그대로 보일 수는 없었다.
아빠를 만나고 온 아이는 싱글벙글이다. 아빠가 키즈카페에 데려가겠다고 했다고 한다. 그리고 일주일 동안 노래를 불렀다.
엄마는 키즈카페 열번도 넘게 데려갔는데, 그 때마다 아빠는 없었는데.... 아빠랑 가는 게 저렇게 특별한가봐... 솔직히 조금 서운한 마음도 들었지만 얼른 지웠다. 조그만 애한테 나 지금 뭐하는 거지?! 아빠랑 키즈카페가서 재밌게 놀고 오면 진짜 좋겠다 우리 아가.
그리고 그게 얼마나 힘든 일인지 애아빠 너도 좀 겪으면 좋겠네.
아이를 미술학원에 넣고 안녕을 하고 나온다. 50분 뒤 아이아빠가 가서 아이를 데리고 나온다. 1년가까이 그렇게 면접교섭을 해왔다. 미술학원 문을 열면서도 나는 오늘 아빠랑 키즈카페 갈거야아. 들어가서 선생님께 인사를 하면서도 선생님 저는 오늘 키즈카페 갈거에요오.
누가 보면 키즈카페 생전 못 가본 애인 줄 알겠네... -_- 생각하면서도. 저렇게 기쁘다니 나도 함께 기뻤다.
키즈카페에 데려간 지 꽤 되었다.
혼자 해야하는 것은 항상 힘이 든다. 아이의 유희와 학습을 모두 책임져야 하는 것은 물리적으로도 힘들고, 궁리해내는 스트레스도 참 크다.
우선 시간이 없었고, 시간이 있으면 내가 너무 피곤해서 갈 수가 없었다. 어지러워서 도저히 회사를 못 가겠던 어느날은 연가를 내고, 아이를 간신히 어린이집에 데려다 주고 병원에 가서 수액을 맞았다. 그렇게 휘청거리며 집에 돌아와 밀린 청소와 정리를 하면서 근처의 어린이 실내놀이터를 검색했다.
매일 엄마가 꼴찌로 온다고 불평을 했었다. 어렵게 낸 연가를 이렇게 날려버릴 수는 없었다. 4시에 가서 짜잔 하며 아이를 찾았다. 기운을 그러모아 높은 톤으로 말한다. 이거봐. 엄마가 오늘은 일찍 왔지? 붐비는 키즈카페에 갈 기운은 안되어도 이 정도면 감당이 가능하다.
여기저기 매달리고, 그림도 그리고 엄마와 책도 읽고 미끄럼틀도 타며 아이는 잘 놀았지만, 그래도 돈 넣으면 멘토스가 나오는 기계도 있고 불빛이 번쩍거리는 기계도 있는 키즈카페도 가고 싶다고 이야기했었다.
그런 아이의 필요를 누군가 채워준다는 것 만으로도 마음이 가벼웠다. 그 가벼움이 너무 낯설어서 당황스러울 정도였다.
누군가와 육아를 함께 한다는 것은 이런 기분이구나. 사이 좋은 부부가 아이를 키우면 이런 느낌이겠구나.
나 혼자 모든 것을 책임지지 않아도 된다는 느낌. 내가 조금 힘을 빼도 아이의 필요가 채워지는 기분이란 것이. 세상에 존재하는 구나. 이런 거구나.... 씁쓸하면서도
한동안 마음의 부담이던 것이 사라지니, 이제 당분간은 키즈카페를 궁리하지 않아도 되겠구나. 라는 사실이 너무너무 홀가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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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 8시 동네 공원에서 아이를 받는다. 아이 손에는 큰 비눗방울을 만드는 긴 장난감이 두개 들려있다. 아이는 대부분 자잘자잘한, 문구점에서 파는 작은 장난감이나 주전부리. 그리고 미술학원에서 만든 작품(?)들을 들고 나타난다.
오늘 키즈카페 재밌었어?
아이는 시선을 돌리며 비눗방울을 휘두른다.
- 아니 안 갔어.
??...응?
- 아빠가 예약을 못했대.
화가, 머리 끝까지 치솟는다. 그리고 피가 거꾸로 도는 것 같다. 와.. 이 $*#^$는 정말 항상 기대 이상을 하네.
아이는 슬프거나 아쉬운 부정적인 감정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엄마인 나에 대해서 화가 나는 것은 즉각 쏟아놓으면서도, 다른 부분에 있어서는 표현하지 않고 숨기는 것을 늘 알고 있었다.
슬플 때에는 눈을 여러번 깜빡여 눈물을 참고 억지로 웃고, 무안하거나 화가 날 때면 말이 없어지고 무표정이 된다. 왜 인지, 엄마가 아닌 다른 사람에 대한 감정은 잘 드러내지를 않는 성격이다.
활발한 척 비눗방울을 휘두르고 있지만 뒤통수 꼭지에 실망감이 달려있다. 더 이야기하고 싶지 않은 것이다. 떼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기껏해야. 헹... 하고 넘어 갔겠지.
키즈카페를 좌절당한 딸한테 미안하니까 비눗방울 장난감을 두개나 사줬구나.
아가, 아빠가 아까 엄마한테 부탁했어. 오늘 예약을 못해서 키즈카페 못 가서 너무너무 미안하대. 그래서 엄마가 내일 예약했어. 그러니까 우리 집에 돌아가서 거기에 있는 키즈카페 가자. 안 가본 데야. 되게 재밌대!
- 어디..? 보여줘봐.
전화기 화면을 들여다보는 눈이 더없이 진지하다.
도대체 이 자식은 왜 이러는 걸까. 살던 집 코앞에 큰 키즈카페가 있는데. 거기 데려가는 게 왜 어려운 걸까. 나 혼자서도 유모차 밀고 여러번을 데려갔었는데. 정말 도대체 왜 이따위 인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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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와 육아를 같이 하는 느낌. 생전 처음이었지만 역시 그 또한. 새벽빛 처럼 순식간에 사라져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