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 -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임신과 출산편)
1992년 11월 23일 월요일
초음파실에서 옷을 입으며 나는 혼자 계속 웃었다.
정기진찰을 받았다. 21주 하고 5일째 되는 날이다. 어제 몹시 힘든 여행 때문에 걱정했는데 아기는 참 씩씩하고 튼튼했다. 지난번 기형아 검사에서도 정상이라고 했다. 아기가 건강하다고 하니까 정말 다행이고 기분이 좋아졌다. 아기가 건강한 것이 무엇보다 큰 행운이고 축복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임신으로 세상 겸손해졌다.
그동안 아기가 많이 성장해서 화면으로 전체모습을 볼 수 없단다. 머리, 몸, 엉덩이. 다리를 따로따로 보여주었다. 몸에서는 척추, 심장, 갈비뼈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그 작은 몸에 중요한 기관들이 다 들어갔다. 생명이란 참으로 경이롭게 신비한 것이라고, 자꾸 생각한다.
아기가 신나고 활발하게 움직여서 의사가 아기 크기를 잴 수 없을 정도였다. 그러면서 슬며시 아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딸이 아니라서 조금 섭섭했지만 동시에 안도했다. '아들은 하나 있어야 한다'는 압박을 받지 않아도 되니까. 아들임을 알았으니 출산 준비를 거기에 맞춰 할 수 있게 되었다.
옷을 입으면서 계속 혼자 웃었다. 자꾸 웃음이 나왔다. 이제 정말 아기를 낳아야 한다는 생각과 어쨌든 남자아이가 태어나는구나.
임신이란 사건은 여성을 위해서 또 남성을 위해서 인간의 행복한 삶을 위해서 그리고 평등한 세상을 위해서 살고 싶어지게 했다. 마음의 준비를 다시 한다.
2025년 10월 31일 금요일
나는 임신을 하고 평등한 세상이 오길 바랐나 보다.
왜 그랬을까?
내 안에 성별과 외모를 알 수 없는 생명이 시작되고 있고,
그 존재는 참 귀하고 소중한데 구별이 차별로 이어지는 게 안타까웠을 거였다.
초음파로는 성별도 외모도 중요하지 않았다. 다만 건강하면 되었다.
사실 부모의 대부분 그랬을 것이다. 우리는 그런 존재였다.
그러면서도 아들이어서 안도했다는 건 지금 생각하면 참 슬픈 안도였다.
인류 역사상 평등한 사회는 없었다는 게 학계의 일반적인 견해다. 사유 재산이 생기면서 더더욱 그랬을 거고, 힘의 논리가 생존과 직결되는 것에서도 당연시된다. 어려운 문제 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원래 그런 거니까’라고 말하기에도 무책임해 보인다.
아이를 가졌을 뿐인데, 젊은 나는 고민이 많았다. 새로운 생명을 이 세상에 내놓는 일이 당시 나에게는 엄청난 책임과 무한한 미안함이 동시에 존재했던 걸로 기억된다. 여성이 지금보다 훨씬 대접받지 못했던 때이니 피해의식 포함 개선되어야 한다는 문제의식까지 더해 경직되어 있는 내가 조금은 안쓰럽다. 좀 더 여유를 가지고 세상을 바라볼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하긴 지금이니까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긴 하다.
특별히 여성에게만 외모지상주의가 더 강요되던 시대였다. 그때도 잘 생긴 남자를 좋아하지 않았던 건 아니지만 ‘남자 얼굴 뜯어먹고 살래?’ 아니면 ‘잘생긴 남자는 얼굴 값 한다’고들 했다. 남성은 꼭 얼굴이 아니어도 괜찮았다. 하지만 여자는 일단 예뻐야 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엔 좀 더 노골적이고 직설적이었다. 그에 대한 반대의견의 목소리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건 못생긴 여성들의 거친 목소리로 치부되던 시절이었다.
박민규의 '죽은 왕녀를 위한 파반느'를 재밌게 읽었었다.
영화 '뷰티 인사이드'도 같은 주제를 다뤘는데, 아이러니하게도 영화 속 남주들은 모두 잘생긴 배우였다.
이진욱이 등장하는 순간 극장 안 여성들의 탄성이 터져 나왔다. 거기 나도 있었다.
그래서 생각해 보니 여성에게만 국한되었던 외모가 최근엔 평등(?)하게 남녀 모두에게 해당되었다는 것이다. 내가 원하는 방향은 아니지만, 그래도 평등해졌으니 그나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씁쓸하다. 이래저래 피곤한 사회가 되었다.
우린 모두 다르다. 다르니까 다양하고 재밌는 거다.
이 쉽고 간단한 사실이 왜 이렇게 어렵고 복잡해지는 걸까?
33년 전 임신했던 내가 바랐던 평등한 세상은 아직 오지 않았다. 하지만 적어도 내 아이에게만큼은 '다름'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법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우리가 추구해야 할 평등은 '똑같아지는 것'이 아니라 '다름을 존중받는 것'은 아닐까?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작은 평등이었을지도 모른다.
외모도 성별도 상관없이 자꾸 웃음이 나왔던 그 마음을 잊지 않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