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 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육아 편)
1993년 4월28일 수요일
태어난지 20일이 된 너는 예쁜 눈을 두리번 거리며 뭔가를 열심히 보면서 놀고 있다.
소리나는 쪽으로 고개와 눈동자가 움직이는 걸 보면 사물을 어느 정도 볼 수 있는게 분명하다.
낑낑거리며 팔과 다리를 쉴새없이 움직이며 무럭무럭 잘 자라고 있단다.
네가 눈을 뜨고 입을 오물거리며 놀고 있을땐 얼마나 예쁜지 뭐라 표현하기가 어렵단다.
특히 나한테 꼭 붙어서 젖을 먹을 때 “모성”이라는 감정이 어떤건지 느낀단다.
아빠는 너의 자는 모습이 제일 예쁘단다 (사실 아기의 자는 모습은 천사니까)
준영이가 비교적 밤에 잘 자는 착한 아가라는 걸 엄마가 얘기했던가?
오늘은 배꼽이 떨어진 기념으로 욕조안에서 목욕을 했다.
목욕할 때 너는 울지않고 오히려 물속에 동동떠서 참 좋아했다.
주사 맞을 때, 목욕할 때 울지 않는 아가는 드물더라. 넌 효자다.
2025년 11월 26일 수요일
"넌 효자다."
일기를 보며 웃음이 났다. 생후 20일 아기를 보고 효자라니.
효도가 뭔지도 모를 아기에게 효자라는 딱지를 붙이는 내가 얼마나 귀여운지.
지난 육아일기를 보면 아이의 예쁜 모습, 아픈 모습을 기록하면서
순간순간을 기억하려고 애쓴 흔적이 보인다.
아이가 생기기 전에 사람의 모습을 이렇게 자세히 알려고 하고,
깊이 책임지려고 한 적이 있었던가? 없었다.
자식이 아니라면 누구의 일상에 이토록 깊숙이 관여할 수 있을까?
절대 불가능한 사랑의 빛깔이다.
아이는 전적으로 24시간 누군가의 완벽한 돌봄이 있어야만 생존하는 이기적인 존재다.
그래서 육아가 종종 나를 짓눌렀지만, 그 책임감이 나를 사회적 제도에 눈 돌리게 했다.
우선 아이로 인해 내가 몸 담고 있는
한국 사회의 취약성과 잠재력을 동시에 바라보게 되었다.
그래서 그 다음 발걸음은 자연스럽게 내가 사는 세상을
더 나은 세상으로 바꾸고 싶은 쪽을 향했다.
내 아이가 살아갈 세상에 대한 책임감은,
아이를 통해 길러진 것이라고밖에는 설명할 수 없다.
육아의 경험은 살면서 내가 가장 이타적일 수 있었던 전환점이었다.
다른 사람을 위해 자기를 버릴 준비가 되었던 시기도
육아할 때가 가장 절정이었다.
그 한 번의 경험으로
희생이라는 가치에 깊이 공감하고 이해하는 마음으로 확장되었다.
하지만 이건 역설이다.
가장 이타적이었던 순간이 사실은 가장 이기적인 순간이기도 하다.
내 아이가 좋은 세상에서 살기를 바라는 마음.
그 모든 이타심의 중심에는 결국 "내 아이"가 있었다.
세상을 바꾸고 싶다는 마음조차 내 아이로부터 시작되었다면,
그건 순수한 이타심일까, 확장된 이기심일까?
이런 질문은 지금도 유효하다.
어쨌든 당시 사회 분위기는 아이가 엄마의 전부인 게 당연했다.
어떻게 아이가 내 인생의 전부일 수 있냐고 반문을 제기하면
나쁜 엄마로, 혹시 계모냐는 눈총도 받아야 했다.
그래도 난 아이가 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고 일기 속에서라도 소심하게 말했다.
그런데 웃긴 건,
아이가 내 전부가 아니라고 말하면서도,
아이 없는 나를 상상할 수 없었던 그 시절.
내 시간과 감정이 몽땅 아이에게 향했던 순간이 없었다면
나는 지금 어떤 사람일까?
안 그래도 자꾸 건조해지는 인생인데
자식을 위해서라도 나를 버릴 수 있었던 그 순간들이 있어서
지금의 내게 수분을 공급하고 있는 것은 아닐지 생각해 본다.
느닷없이 출산 장려 육아 에세이가 되는 것 같지만
오해하지 마시라.
그때나 지금이나 난 혼자 있는 걸 좋아하고
혼자 보내는 시간을 사랑한다.
혼자만 있는 삶 또한 가치가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자식이 없어도 얼마든지 훌륭하고 행복하게 살 수 있다.
하지만 자식을 통해서 배운 것들—사랑과 배려, 겸손,
그리고 무엇보다 늘 감사하는 마음—은 나에게 소중한 삶의 덕목이었다.
이런 덕목들이 오직 육아를 통해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다른 길로도 배울 수 있다.
하지만 나는 그 길을 선택했고, 그 길을 통해 배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