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풍백화점 붕괴에서 남은 자

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 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사회 편)

by 꼭두새벽

2026년 1월 21일 수요일


1990년대는 안전불감증이라는 말이 나왔던 시대였다.

사고공화국이란 말도 있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1994년 10월)도 충격이었지만

일년이 채 안돼서 일어난 삼풍백화점 붕괴는 개인적으로 잊지 못할 사건이었다.


1995년 7월 1일 토요일

일기를 쓸 수 없었다.
이틀 전 나는 살아서 집으로 귀가했다.
어쩌면 아니 정말로 기적일지도 모른다.
삼풍이 무너지던 날 밤 10시가 넘어서 집에왔다.
준영이는 자고 있었다. 나는 아이를 안고 숨죽여 울었다.
집안 분위기가 숙연해졌다.
TV에는 계속되는 현장보도가 이어지고 있었다.
불과 1시간 전에 나는 그 현장에 있었다.
남편은 티비를 끄고 나를 달랬다.
엄마는 아마 가슴을 쓸어내렸을 거였다


이 짧은 일기를 통해 그때를 기억해냈다.

당시 나는 작은 이벤트회사에 다니고 있었고,

자연사박물관이 없었던 한국에서 국내 최초로 에어돔을 설치해

공룡전시회를 개최하는 프로젝트를 진행 중이었다.

그 전날이었는지 그 날 오전이었는지 제법 비가 많이 내렸던 것 같다.

아무튼 비 때문에 에어돔의 토목공사가 현장에서 난항을 겪고 있어서 본사 사무실도 바빴다.

현장에서 긴급하게 연락이 올까봐 점심시간에도 사무실을 비울 수 없었다.

그래서 오랜만에 다같이 핏자를 시켜먹고 나가지 않은 날이었다.

여름으로 가는 6월 29일 늦은 오후 였다. 해가 길어지고 있어서 아직 밖이 훤했다.


그때,

갑자기 엄청난 굉음과 함께 창문이 흔들리면서 사무실 창문이 몇 개 깨지기도 했다.

우리는 전쟁이 났는 줄 알았다. 전쟁이 아니고서야 있을 수 없는 일이지 않겠는가.

처음엔 폭탄이라고 생각했다.

어안이 벙벙해서 서로를 쳐다보다 잠시 후 깨진 창문 너머로 먼지가 하얗게 올라가는 걸 보았다.

누구랄 것도 없이 모두 건물 밖을 뛰쳐나가 연기의 실체를 보았다. 아비규환 이었다.

그때 우리 사무실은 서초역 사거리 코너에 있던 건물이었다.

그러니까 무너진 삼풍의 건너편이었던 것이다.

나머지는 보도된 대로다.


눈 앞에서 벌어진 현장에서 우리는 뭐라도 해야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헌혈이었다. 사무실 직원들은 영동 세브란스 병원으로 달려갔다.

근처 직장인이나 주민들이 너 나 할 거없이 몰려 1시간 씩 줄을 서서 헌혈을 했다.

나는 몸무게 미달로 못하고, 같이 일하던 어린 여직원도 헌혈을 못했다. 생리중이었다.

영동 세브란스에서 돌아서는데 눈물이 쏟아졌다. 뒤늦게 다리도 후들 거렸다.

헌혈을 못한 어린 여직원과 나는 서로를 붙들고 그제서야 엉엉 울었다.


삼풍백화점 지하에서 밥을 먹거나 근처 식당에서 점심을 먹더라도

남은 시간은 거의 매일 삼풍백화점을 돌면서 수다를 떠는 일이 일상이었다.

그때만 해도 커피가 지금처럼 대중화 되기 전이여서

우린 각자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을 하나씩 입에 물고 삼풍백화점을 내 집처럼 헤집고 다녔다.

우리의 최애장소는 수영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는 것이었다.

그날 가장 먼저 붕괴 된 곳이 수영장이 있던 곳이었다고 한다.


나는 가끔 삼풍백화점에서 가족들 생일 선물이나,

준영이 간식을 사러 퇴근전에 들르기도 했는데,

그날은 점심에 못 갔으니 저녁에 들러서 약간의 쇼핑을 하고 갈 계획이었다.

몇가지 구입할 목록을 머리속에 저장하고 있었다.

내가 짬을 내서 가려던 시간대에 삼풍은 무너졌다.

정확한 시간은 아닐지라도, 오후 5시30분에서 6시 사이였던 것으로 기억된다.

내가 간발의 차이로 그 무너진 현장에 있을 수도 있었던 것이다.

실제로 저녁 준비로 두부를 사러나왔다가 참변을 당한 주부도 있었다.

백화점 지하 식품매장을 이용하는 삼풍아파트 주민들이 많았다.


나는 가족은 물론이고 무엇보다 준영이에게 다시는 돌아올 수 없었을 수도 있었다.

자고 있는 아이를 보며 이 어린 걸 두고 내가 죽을 수도 있었다고 생각하니

복받치는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다.

내가 거기 없어서 다행이라는 생각은 안 했던 것 같다.

멀리서 매체를 통해 보는 비극(전쟁이나 사고)은

내가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감정이 자연스럽다. 안전한 곳에 있었다는 안도감일 거다.

94년 10월에 티비에서만 보던 성수대교 붕괴사고 때는 그랬다.


그러나,

바로 옆에서 겪은 비극은 살아남은 자의 미안함이 꽤 오래갔다. 남은 자...

나는 남은 자였다.

우리가 지나가며 한 번씩 웃음으로 목례를 하던 2층 옷 가게 언니는 어떻게 됐을까?

올린 머리가 예뻣던 1층 향수 매장 아가씨는 살았을까?

앞치마가 잘 어울리고 덤을 잘주던 지하 식품매장 사장님은 어떻게 됐을까?

사실 나는 그들의 이름도 모른다. 그저 매일 지나가면서 뻔한 안부를 물었던 사람들이다.

사망자의 명단을 확인해도 나는 누가 살았고 누가 참변을 당했는지 몰랐다.

죽은 사람들의 죽음은 개별적인 죽음이지만

나는 살아서 “삼풍 참사”로 퉁쳐서 생각할 수 밖에 없었다.


무엇보다

왜 나는 살았을까. 왜 나는 그 시간에 거기 없었을까. 그 질문에는 답을 모른다.

다만, 살아서 미안한 나는 그때부터 재난 영화는 못보는 사람이 되었다.

나는 지금도 재난 영화는 못 본다. 나만의 트라우마 같은 거다.


처음 얼마간은 남은 자의 미안함으로 씩씩하게 살아야 한다는 책임감이 있었던 것같다.

하지만 그마저도 시간앞에 조금씩 그리고 완벽하게 잊혀졌다.

운좋게 살아 남은 나는 훌륭한 인생을 살았어야 했지만, 그렇치 못했다.

세상이 원하는 성공에 다가서기 위해 노력했고, 인정받고 싶어했다.

가족 이기주의도 언제든 필요할 때 발휘되었다.


코로나가 한창 기승를 부리던 어느 날,

산에 오르는데 태풍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가 확연히 드러났다.

멀쩡하던 나무가 우직끈 부러져서 길을 덮치거나 옆 나무를 덮친 모양을 보았다.

초록의 싱싱한 가지가 태풍에 꺽여 산길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사람 사는 일도 비슷하지 않으까 생각했다.

멀쩡하게 살다가 어느 날 예기치 못한 사고나 천재지변(인재포함)으로 생을 마감하는 것.

그게 나일 수도 내 가족일수도 있다는 것.

삶 앞에서 겸허해지는 순간이 바로 이럴 때 였다.


그렇다고 안전에 대한 예방이나 인재(人災)을 가벼히 여긴다는 말은 절대 아니다.

삼풍 참사는 명백한 인재였고, 누군가의 탐욕과 무책임이 502명이 숨지고

약 937명이 부상당했다. 한국에서 비전시 재난 중 가장 많은 사망자를 냈다.

그 참사가 준 교훈을 잊어서는 안 된다.


다만, 예측할 수 없는 어떤 사고나 불행 앞에서 우리는 나약하다는 것.

그런 불행을 당한 사람들이 뭘 잘못해서 벌을 받은 것이 아니라는 것.

그저 그 시간, 그 장소에 있었을 뿐이라는 것.


그러니 우리는 현재의 삶을 충실하게 살아내야 한다는 사실이다.

과거의 모습을 돌아보는 것도 결국 지금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한 참고용이다.

미래에 내가 어떤 모습이면 좋겠는지를 두고 계획을 세우는 것도

오늘의 내가 어디에 집중해야 하는지 알게 해주는 도구라고 생각한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 순간만이 내 것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려고 한다.

이것이 남은 자의 깨달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