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 나에게로 가는 시간- 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사회 편)
1995년 2월 13일 월요일
새로운 직장을 구해 일주일째 다니고 있다. 일단 일을 시작하니까 좋기는 한데 앞으로는 준영이가 걱정이다.
그동안 친정엄마가 종일 맡아 주었는데 엄마도 당신의 삶이 있으니 언제까지고 기댈 수 없을 것이다. 육아는 누구에게도 함부로 부탁하기에는 너무 많은 정서적 육체적 희생을 강요하라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우리 집에서 준영이는 분명 웃음의 원천이다. 저녁이면 삼촌들까지 다 모여서 아기를 가운데 놓고 동그랗게 둘러앉아 재롱을 보며 하루동안 있었던 준영이의 성장을 들으며 웃음꽃을 피운다.
준영이가 아니었으면 어른 5명이 매일 저녁 웃을 일이 뭐가 있겠는가?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기는 어른들의 삶 속에서 일부분으로 녹아들 수밖에 없다. 전부 일수 없는 것이다.
아무튼 준영이는 가족들의 사랑과 지대한 관심으로 22개월을 살았다.
2026년 1월 10일 토요일
아이가 돌이 되던 해, 94년 12월 31일로 일자리에서 밀려났다.
경력관리를 할 줄 몰랐던 나는 그 후로 오랜 시간 그야말로 닥치는 대로 안 해본 일이 없다.
대학입시학원을 운영하게 되는 2006년까지 십여 년의 세월을 자발적 열정페이였다고 회상한다.
그 시작은 삼풍백화점이 붕괴하던 시절, 3년정도 다녔던 이벤트 회사였다.
이후 사수였던 실장을 따라 무역회사로,
그리고 방송구성작가와 알바를 전전하며 드라마 작가지망생으로 글을 썼던 때까지가
나의 열정페이 전반전이었다.
누가 시키지도, 강요하지도 않았는데 스스로 그 구렁텅이 속으로 나를 밀어 넣었다.
요즘 세대가 말하는 열정페이가 사회적 착취라면, 나의 열정페이는 일종의 '자발적 수업료'였다.
한 인간으로서 인정받고 싶다는 허기진 욕망을 채우기 위해, 나는 기꺼이 내 시간과 노동을 헐값에 내던지는 도박을 시작한 것이다.
냉정하게 돌아보면, 1차 부양자인 남편 월급이 받쳐주었기 때문에 부릴 수 있는 교만이었다. 친정엄마가 아이를 돌봐주었기 때문에 육아와 살림에서 어느 정도 자유로울 수 있었던 것도 큰 비중을 차지한다. 그랬으면 뭐라도 이루어냈어야 했는데 아무것도 남은 게 없었다.
당시 시대가 요구하는 여성상은 현모양처라는 이름 아래 남편과 아이를 뒷바라지하는 것이었다.
나는 그 관습에 묶여 있던 거의 마지막 세대였다. 나는 그 틀을 거부했다.
남편이 벌어다 주는 돈으로 사는 것이 당연하던 시절이었지만, 이상하게도 나는 그것이 자존심 상했다.
개뿔 가진 것도 없으면서 '한 인간'으로서 사회에서 인정받고 싶었고,
그 인정을 남성의 호의에 기대어 얻고 싶지 않았다.
쥐꼬리만 한 월급이라도 내 손으로 벌다 보면 언젠가 세상이 나를 알아줄 거라 믿었다.
더 어이없는 건 그 열정페이는 나중에 내 사회적 경력에 공식적으로는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았다.
그때나 지금이나 숫자로 정량화되지 않는 것을 증명할 방법은 없다.
비 공식적으로는 도움이 되었을까? 솔직히 내 속에 어떤 내공이 쌓였는지는 모른다.
남성들의 세계로 편입되고 싶었던 간절함과는 달리 나는 빈틈없이 무너져갔다.
지금 같으면 공무원 시험이라도 준비했겠지만,
그때 나는 그런 길이 내 욕망을 그나마 안정적으로 실현시킬 수 있는 길이란 걸 꿈에도 생각 못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너덜너덜하고 기진맥진했다. 자존감은 바닥이었다.
겉으로는 나름 괜찮은 사회생활을 하는 듯이 보여야 했고. 안되면 위장이라도 해야 했다.
내 선택이 틀리지 않았음을 증명해야 했으니 '이 길이 아니었나 봐' 하면서 돌아올 수 없었다
돌아갈 배를 태워버린 형국이었다. 남은 무기는 성실과 책임이었다.
개미처럼 열심히 일상을 살았으나,
일상의 노예가 되었고 열매는 없었던 젊은 날들이었다.
나는 내 적이 어떤 모습인지 나한테 왜 그러는지 몰랐다.
분기 탱천 했으나 세상 공부는 하지 않았으니,
성실함과 열정이 더해질수록 내 작전과 계획은 소용이 없었던 것이다.
그때 한국사회는 나 같은 여성에게는 다분히 적이었지만, 적의 모습을 하고 있지 않았다.
환경이나 제도 같은 외부의 모순을 볼 줄 몰랐던 나는
내가 모자라서, 내가 못나서 받아들여지지 않는다고만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은 나의 열정페이가 이중적이었음을 눈치챘다.
한 인간으로 증명받고 싶다는 나의 ‘뜨거운 욕망’이 한 축이었고,
여성의 노동을 정당하게 평가하지 않거나 개인의 '노오력'에만 모든 책임을 전가하는
‘냉혹한 사회 시스템’이 다른 한 축이었다.
나중에서야 알게 된 능력주의의 모순과,
88세대라고 불렸던 삼포 세대가 '노오력'을 왜 빈정대는지 누구보다 공감했다.
그쪽 방면으로는 어쩌다 보니 선구자의 길을 걸었던 것이었다.
시대를 공부하지 않았던 내 무식에 일정 비율 책임이 있다는 걸 인정해도,
내 인생의 일부분이 시대에 희생된 것도 사실이다.
나의 열정페이는 그렇게 열매 없이 막을 내렸다. 내 30대도 막을 내렸다.
일송정 푸른 솔은 그렇게 홀로 늙어갔다.
그 와중에 엄마의 빈자리를 채워주던 할머니의 손에서 준영이는 무럭무럭 자랐다.
그래도 나는 마치 옆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해주는 일에는 열심이었다.
아이에게 끊임없이 엄마의 일이 얼마나 중요한지 설명하고 이해받으려 했다.
착한 아이는 엄마의 말을 추호의 의심 없이 받아줬다.
참으로 무던하고 이해심 많은 아들이었다. 그건 내 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