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재: 나에게로 가는 시간-33년을 건너온 육아일기(육아 편)
1994년 10월 31일 월요일
그동안 육아일기에 써왔던 건 거의 아이의 이쁜 모습, 그래서 느끼는 기쁨을 주로 적었다. 이 기록을 나중에 준영이에게 보여주어야 하기 때문에 좋은 것만 기록하고 싶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건 진실된 육아의 모습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늘 한쪽 구석에 자리 잡고 있음을 고백한다. 그래서 솔직한 내 상태를 말하고 싶다.
육아는 힘들다. 물론 아이가 자라면서 얻어지는 기쁨을 몰라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절대 아니다. 하지만 꽤 긴 시간 동안 머리에서 발끝까지 철저히 돌봐줘야 하는 세상 이기적인 존재가 아기다. 그만큼 아기에게 있어서 엄마는 절대적인 존재라는 다른 말이기도 하다 (아빠는 아무래도 2차적이다). 그건 종종 엄마에게 엄청난 스트레스로 밀려온다.
나는 음악을 좋아한다. 지금도 어떤 음악을 들으면 하던 일을 멈추고 잠시 빠져드는 사람이며, 좋은 영화가 상영되면 미치도록 보고 싶고, 퇴근길에 들려오는 무명가수들의 공연을 편안하게 관람하고 싶은 사람이다. 준영이 엄마지만 여성이며, 대학원 진학을 위해 새벽엔 영어학원도 다니고 싶은 사람이다. 그럼에도 아이를 키운다는 것은 그 어느 것보다도 우선한다. 사실은 거의 모두를 포기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이다. 그건 어떤 부모도 마친가지다. 직장을 나가지 않는 전업주부는 더욱 심할 것 같다. 아기 때문에 식사조차 앉아서 못 먹는다고들 말하니까.
세월이 흘러 그렇게 절대적인 자리였던 부모는 차츰 그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아기가 자라 어린이가 되고 학교에 들어가고 엄마의 손길을 기다리는 횟수가 줄어드는 믿기지 않는 세월이 오게 된다. 제 방에서 문을 닫고 부모보다는 친구와 더 많은 시간을 갖는 때가 올 것이다. 나도 그랬으니까.
돈과 시간과 노력을 들여 전력투구하면 뭔가 주어지는 게 있게 마련이다. 하지만 우리가 키운 자식은 고맙다는 말 한마디 건네주지 않고 슬그머니 부모의 품 안에서 빠져나갈 것이다. 시기와 정도의 차이는 있겠지만 그 허전하고 쓸쓸함을 이루 말할 수 없을 것 같다. ‘내가 저한테 어떻게 했는데, 내가 널 어떻게 키웠는데’ 하면서 눈물을 흘리지만 않아도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요즘 부모들은 다들 약아서 미리 마음으로 대비하고 노후대책도 세우겠지만 그것과는 별도로 한 구석이 씁쓸한 것은 분명 어쩌지 못할 것이다.
우리 아이들은 21세기의 주역이 될 것이다. 그리고 그들이 주역이 될 때 우리는 인생의 가을을 조용히 맞고 그러다 죽음을 준비하는 날이 올 것이다.
나는 자연에서 많을 것을 깨닫는다. 단풍이 곱게 물들면 잠시 후 낙엽으로 땅에 떨어지고 그건 또다시 흙과 함께 묻혀 거름이 되어 비옥한 토양을 만들 것이다. 기꺼이 나무의 다음 새싹을 위해 거름이 되어준다. 우리 인간도 이와 같은 이치와 조금도 다르지 않다고 믿고 있다. 그러니 우리가 낙엽 되어 흙으로 간다고 눈물에 젖을 일만은 아니다. 우리의 아이들은 내가 썩어 만든 토양으로 무성한 나무로 자라야 한다. 더구나 부모의 토양만으로는 안 되는 시대에 우리는 살고 있다. 우리의 이웃도 학교도 사회도 모두 그 나무를 자라게 하는 토양이 되기에 나의 아이는 우리 모두의 아이도 되는 것이다.
육아를 하면 할수록 느끼는 건, 육아는 절대 젊은 엄마 하나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유가 그래서이다. 하지만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이 평범한 사실에 동참하느냐는 잘 모르겠다.
2026년 1월 7일 수요일
이 일기는 사실 보탤 것도 덜어 낼 것도 없는 당시 나였다.
겨우 18개월 된 아이를 두고 자연의 이치를 운운하며 30년 후를 바라보면서,
때 이른 자녀와의 분리를 미리 계획하고 있던 내가 기특하다기보다는 이상하게 짠하다.
94년 10월, 나는 서울대병원 연구소 자료실에 근무했었다. 직장이 혜화동이다 보니 직장과 가까운 곳으로 이사를 해서 상계동에 거주할 때였다. 학교 때부터 대학로와 혜화동은 나의 주 무대였다. 그러니 내 20대와 30대 초반까지 잔뼈가 굵은 곳이라고 할 수있다. 그때도 대학로는 버스킹이라고 불리는 길거리 음악회가 상시 있었다. 저녁에 퇴근하고 집에 가는 길에 들려오는 노랫소리는 내 발길을 붙들었다. 하지만 아이가 집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기에 스쳐 지나가는 것으로 만족했다.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되는 일은 더 갈급함이 있게 마련이다. 병원문에서 바로 혜화역으로 들어가는 입구를 마다하고 굳이 횡단보도를 건너 마로니에 공원을 한 바퀴 돌면서 조금 천천히 전철역으로 향하는 것으로 만족해야 했다.
그 당시에도 자녀에게 모든 걸 걸지 않고, 자신의 미래를 준비하려는 움직임들이 있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제도나 시스템은 물론이고 특히 정서적으로 쉽게 꺼낼 수 있는 얘기는 아니었다고 기억된다. 그런 연장선에서 대학원 진학을 포기한 사건이 있었다.
당시 주요 일간지에서는 대기자제도(전문기자)를 새롭게 도입해서 기자를 채용한 적이 있었다. 예를 들면 병원 출입기자는 의대출신자를 채용하는 식이였다. 그때 친하게 지내던 기자도 그런 대기자로 채용된 의대 레지던트까지 마친 사람이었다. 의국에서 주로 기사를 쓰거나 내가 있던 자료실에서 기사를 쓰곤 해서 이런저런 개인적인 이야기도 주고받던 사이였다.
한 번은 내게 볼멘소리로 “여자들은 좋겠어요.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남자보다 더 자유롭게 할 수 있어서” 그 말은 내 심기를 건드렸다. 그래서 왜 그런 말을 하냐고 전투태세를 갖추고 물으니 자신의 와이프가 대학원을 진학했다는 것이다. 물론 그 등록금은 순전히 자기 몫이라며, 자신은 등골이 휜다고 했다. 아내가 자기계발하는 것도 좋고 다 좋은데 가족부양의 1차 책임이 남자에게 있으니 별 고민 없이 그렇게 결정한 거 아니겠냐며 불공평하다고 했다.
처음엔 가졌던 전투태세가 수그러들었을 뿐만 아니라 “가족부양의 1차 책임이 남성에게 있다”는 말은 무거웠다. 남성들이 갖는 가정경제의 부담이 새삼 이해가 되었다. 이해가 되니까 아이를 두고 직장을 다니면서 대학원까지 가겠다고 할 수 없었다. "육아의 1차 책임이 여성에게 있어서 자유롭지 못하다"고 늘 입버릇처럼 떠들고 다녔으니 할 말이 없었다. 그 기자는 아직 아기가 없었다. 대학원으로 진학하려던 내 목표는 입 밖으로 나오기 전에 가볍게 무산되었다.
안정적인 직장도 94년 12월 31일까지였다.
그 후로 단 한 번도 내 삶이 안정되거나 고정되어 있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자의 반 타의 반이었다. 어쨌든 그건 고통이었고 때론 가난이라는 이름으로 나를 불편하게 했다.
내 선택에 책임지면 된다고 생각했지만, 책임진다는 건 허허벌판에 혼자 버려진 느낌이어서
한없이 막막한 적이 많았다. 가끔은 나도 편안 길로 안정되고 고정된 길을 가지 않은 걸 후회했다.
하지만 이미 건널 수 없는 강을 건넜다. 무엇보다 돌아갈 배가 남아 있지 않았다.
위대한 장군처럼 일부러 배를 불사르고 건너온 건 아니지만, 무슨 연유에서 인지 배는 없었다.
사실, 94년의 일기 속에 '거름'이니 '토양'이니 하며 호기롭게 써 내려간 문장들을 다시 읽으니 민망함에 얼굴이 화끈거린다. 그때의 나는 마치 대단한 깨달음을 얻은 수행자처럼 굴었지만, 실상의 나는 그저 내 안의 욕망과 현실 사이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휘청대던 초보 엄마일 뿐이었다.
마음 한구석에서는 대학로의 버스킹 소리에 귀를 쫑긋 세우고, 포기한 학업에 미련을 두며, '나'를 잃어버리는 것에 전전긍긍했다. 아이를 위한 거름이 되기는커녕, 나라는 나무 한 그루가 쓰러지지 않으려 아등바등 버티느라 아이를 제대로 살피지 못한 날들이 더 많았다.
결국 나는 육아에 전력투구하는 완벽한 엄마가 되지 못했다. 그저 끊임없이 흔들리며, 육아라는 파도에 휩쓸려 가지 않으려 필사적으로 '나'라는 밧줄을 붙잡고 살았을 뿐이다. 아이를 위해 살았다고 말하기엔 부끄러운, 철저히 나를 지키기 위해 고군분투했던 시간이었다.
그런데 참 아이러니하다. 그렇게 부족하고 이기적이었던 엄마 밑에서도 아이는 제 갈 길을 찾아 자라주었다. 내가 비옥한 토양이 되어주지 못했음에도, 아이는 척박한 땅을 스스로 뚫고 나와 제 몫의 잎을 틔웠다.
지금 내가 느끼는 이 평온함은 '할 도리를 다했다'는 뿌듯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렇게 흔들리며 나만 생각하며 살았어도, 결국 여기까지 무사히 흘러왔구나" 하는 안도감에 가깝다.
거름이 되지 못해 흔들렸던 그 모든 비루한 시간조차 결국 '나에게로 가는 시간'이었음을, 이제야 고백한다.
그 모든 선택이 엉망이었다고 해도 치열했던 것은 분명했다. 그리고 젊음이 아무리 좋아도 그때로 돌아가고 싶지 않을 만큼 치열함은 고단했다. 그 모든 걸 지나온 지금은 다행히 평안하고 훨씬 가벼워서 들 고단하고 들 힘들다. 이유는? 아마 지랄 총량의 법칙을 거의 다 사용했을 가능성이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