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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펭귄 Oct 30. 2022

자기만의 템포: 위플래쉬

특성화고 영상과 선생님과 학생의 방과 후 수업

소현: 네가 찾은 ‘위플래쉬’ 잘 봤다. 이 영화가 너의 질문에 답이 됐던 것 같아?

현우: 네.

소현: 오만하지 않으면서 스스로 존중하고 타인에게 인정받을 수 있다는 게 영화에 그대로 나와?

현우: 네. 특히 엔딩 장면에서 자신만의 템포에 맞춰서 드럼을 치는 게 전율이 느껴졌죠.

소현: 기가 막혔지. 그런 말이 있잖아. 도 닦았다, 라는 말. 앤드류의 드럼 연주가 딱 그걸 보여줬던 것 같아. 정말 신들린 듯 연주했잖아. 그 순간 앤드류는 플래처 선생님이나 다른 관객들로부터의 인정욕구를 넘어서 자신을 뛰어넘는 걸 우리한테 대리 경험하게 했던 것 같아.

현우: 맞아요. 그래서 영화가 끝나고도 음악이 계속 느껴졌던 것 같아요. 영화가 클라이맥스에서 막을 내렸기 때문에 여운이 남았어요. 

소현: 그러면 기습질문을 해볼게.

현우: 묵비권을 행사하겠습니다.

소현: 이제 너의 오만을 인정해?

현우: ….

소현: 대답해 봐.

현우: 쌤 질문이 잘못된 것 같아요. 이제라니요, 저는 원래부터 저의 오만을 인정하고 살았어요.

소현: 왜 지난주하고 말이 달라?

현우: …. 기억이 잘 안 나네요.

소현: 부끄러움을 느꼈어?

현우: 느꼈을 수도 있죠.

소현: 어떤 부분에서 그렇게 느꼈어?

현우: 앤드류가 처음으로 메인 드러머가 됐는데 플래처 교수가 카라반 곡의 메인 드럼을 바꾸겠다고 했던 장면이요. 플래처 교수가 코널리한테 연주를 시키고 완벽하다고 하니까 앤드류가 화를 내면서 진심이냐고 쓰레기 같았다고 하잖아요. 그 장면이 오만이라고 느껴졌어요.

소현: 앤드류가 손에 피 흘려가면서 연습하고 따낸 자린데, 코널 리가 갑자기 와서 뺏는 것처럼 느꼈던 거지. 어떻게 보면 그 행동은 납득가긴 해. 감정이입이 돼서 나도 같이 억울하더라. 하지만 그게 오만은 맞지.

현우: 네. 앤드류는 코널리가 연습실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의문이라는 표정을 지었잖아요. 자신을 코널리보다 우위에 뒀기 때문에 나올 수 있는 표정이었고 그러니까 코널리 연주가 쓰레기 같다고 할 수 있었던 거죠.

소현: 너 자신한테 반영이 됐어?

현우: 네. 지난주에 얘기했던 제 모습을 앤드류를 통해서 객관적으로 볼 수 있었던 것 같아요. 근데 좀 불쌍했어요. 이 경쟁사회에서 플래처 교수한테 인정받으려고 노력했는데 그 대가가 오만이었다니….

소현: 맞아. 안타까운 거지. 네 말대로 이 사회에서 인정욕구를 쉽게 버리기도 힘드니까. 사실 잘 들여다보면 결국 그 인정욕구는 열등감에서부터 비롯돼. 오만하게 되는 것도, 자신의 열등한 점보다 타인이 더 열등하다고 느꼈을 때 안심이 되면서 우월감을 느끼는 거거든. 그래서 덜 열등하다는 것을 인정받으려고 하는 거야.

현우: 그쵸. 실력이 어쭙잖은 상태일 때 더 그런 것 같아요. 앤드류의 경우도 단지 한 번 플래처 교수한테 인정을 받았다는 걸로 우쭐해서 가족들한테 자만을 보이잖아요.

소현: 아, 앤드류가 사촌들 자랑을 듣고 2군도 아닌 3군이라고 무안 주는 장면?

현우: 네 맞아요. 

소현: 앤드류가 자신이 메인 드러머가 됐다는 게 엄청나게 자랑스러운데, 그런 건 주목받지 못하고 다른 사촌들이 주목받으니 그런 태도를 보였지. 분명 그 악명 높은 플래처 교수한테는 인정을 받았는데 내 가족한테 인정받지 못하는 기분이 들었던 거야. 그러니 그 인정욕구라는 게 얼마나 채워지기 힘든지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지.

현우: 그럼 쌤은, 선생님의 입장으로 플래처 교수를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소현: 독단적이라고 생각하지.

현우: 올바른 교육방식이라고 할 수 있나요?

소현: 상당히 폭력적이라는 점에서 올바른 교육방식이라고 결코 말할 수 없지.

현우: 그러면 앤드류의 성과를 봤을 때 플래처의 교육방식이 아니었다면 영화에서 말하고자 하는 자신만의 템포를 찾지 못했을 텐데 딜레마 아닌가요?

소현: 플래처 교수 덕에 앤드류가 자신을 뛰어넘을 동기가 마련됐다는 건 분명해. 그런데 플래처 교수가 과연 그런 큰 그림을 그리고, 학생들이 자신을 뛰어넘길 바라는 마음으로 교육방식을 택했을까? 그건 아니라고 생각해. 넌 어떻게 생각하는데? 옳은 교육방식인 것 같아?

현우: 옳다고 단정 지을 수 없지만 폭력적인 플래처 교수한테 배우는 학생들이 자발적으로 밴드를 나가지는 않잖아요. 플래처한테 쫓겨났던 학생도 결국 대회 당일에 돌아오고요. 수업을 듣는 학생들 모두 성공한 뮤지션이 되고 싶은 야망이 있는데 플래처가 그 야망을 성공시켜줄 수 있으니 학생들이 남아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채찍은 폭력적이지만, 성공으로 갈 수 있는 가장 빠른 길 아닐까요?

소현: 자신의 성공을 누군가한테 맡길 수 없는 거니까 그 말은 애초에 성립될 수가 없어. 영화에서의 채찍질은 플래처 교수가 앤드류한테 행하는 걸 뜻하는 게 아니라, 앤드류가 자기 자신을 혐오하게 되고 벼랑 끝까지 밀어붙이면서 연습했던 걸 뜻하는 거지. 플래처의 교육방식은 결코 학생들을 존중하는 방식이 아니었어. 심지어 그 교수의 폭력적인 교육 때문에 자살한 학생도 있었잖아.

현우: 플래처의 교육방식은 장단점이 있는 것 같아요. 자신의 이미지를 포기하고 학생들을 채찍질하는 게, 학생들의 꿈을 존중하는 거기 때문이라고 생각해요. 인간으로서 존중한 건 아니겠지만요. 인간이 완전할 수 없고 그런 인간이 하는 교육도 완전하지는 않으니까 장단점이 있는 거예요. 학생들을 향한 인신공격이나 폭력은 분명 나쁜 게 맞지만, 앤드류가 한계를 뛰어넘은 동기가 플래처의 욕설과 폭력인 건 사실이잖아요. 안타까운 현실이죠.

소현: 뭐, 플래처 교수가 분명한 도화선이었다는 건 동의해. 그런데 플래처 교수의 교육방식이 어쨌건 간에, 결국 앤드류가 자신을 뛰어넘은 건 자기 자신이었잖아. 그런 앤드류를 통해서 알 수 있는 게 있어. 인정받으려고 하는 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거야. 자신에 대한 존중이 선행해야만 진정한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는 거거든. 그래야 비로소 오만을 떨쳐낼 수 있는 거고, 채워지지 않는 인정욕구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거야.

현우: 인정받으려고 하면 자신으로 살아가는 게 아니라는 말이 무슨 말이에요?

소현: 앤드류가 플래처 교수한테 인정받으려고 노력하고 그 인정을 얻었다가 또 잃었다가 하면서 드러머로서의 삶을 완전히 플래처의 기준에 맞춰버렸잖아. 롤러코스터를 타듯이 플래처의 인정과 불인정에 따라 앤드류의 행복과 불행이 결정됐다는 걸 보면 알 수 있지.

현우: 그건 앤드류가 원하는 목표에 도달하기 위해 노력을 한 거잖아요. 앤드류 기준에서는 플래처의 인정이 곧 자신의 목표였으니까 어찌 보면 앤드류의 삶이라고 할 수 있잖아요.

소현: 그게 앤드류의 진짜 자신으로서의 삶이었으면 마지막 엔딩 장면이 그렇게 나오지는 않았겠지. 앤드류가 처음으로 플래처의 박자를 거스르고 그 거대한 무대에서 자신만의 연주를 했잖아. 그리고 그 모습에 뭐 하는 거냐고 욕을 하던 플래처도 나중엔 앤드류 연주에 맞춰 지휘를 하고 결국 처음으로 웃어 보이잖아. 플래처의 박자를 기준으로, 그 사람의 인정을 바탕으로 드러머라는 자아를 구축했던 걸 벗어난 거야. 비로소 자신을 존중하고 채워지지 않았던 인정욕구로부터 해방된 거지.

현우: 그럴 수 있겠네요. 그럼 마지막 무대 전까지는 드러머로서 앤드류가 타인의 삶을 산 거라고 볼 수 있네요. 선생님도 앤드류처럼 인정욕구 때문에 타인의 삶을 산 적이 있어요?

소현: 누구나 다 있지. 그리고 지금도 끊임없이 의식적으로나 무의식적으로 인정욕구에 맞닥뜨리겠지. 현우 말처럼 그럴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진 사회이기도 하고.

현우: 그래서 쌤은 언제 인정을 갈망했어요?

소현: 어렸을 때 많이 그랬던 것 같아. 나도 앤드류처럼 고등학교 때 선생님한테 인정받고 싶어서 애썼던 기억이 나. 그리고 선생님의 눈 밖에 났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진짜 불행하다고 느껴지기도 했어.

현우: 근데 쌤은 재능 있는 학생이었으니까 애쓸 필요 없던 거 아니에요?

소현: 욕구라는 게 욕심의 일종이잖아. 이미 인정받고 있었는데 더 눈에 띄는 학생이고 싶었던 것 같아. 그래서 그 욕심에 내가 발이 걸려서 나중엔 오히려 무관심의 대상이 됐었어. 그 선생님이 진짜 딱 플래처 교수 같은 선생님이었거든. 넌 어때? 타인의 인정을 갈망한 경험이 있어?

현우: 저도 인정을 받고 싶어서 전교 1등 했잖아요.

소현: 아, 그렇지. 그래서 오만해지기도 했지. 근데 그건 그럴 만했어. 드라마를 쓴 거나 마찬가지니까.

현우: 그래도 이제 오만함을 경계해야 된다는 걸 알잖아요. 인정욕구를 채우는 것보다 제 스스로 존중하는 게 먼저여야 더 성숙한 사람이 되는 거니까요.

소현: 역시, 누구한테 배웠는지 아주 잘 배웠어.

현우: 쌤, 지금 다시 오만으로 빠지시는 거 아닌가요?!

소현: 넘어가자.

현우: 네.

소현: 어쨌든 결론은, 인정욕구를 채우기 이전에 자신의 템포를 찾는 게 먼저라는 거야.

현우: 네. 그리고 템포를 찾아감에 있어서 가장 큰 장애물은 아무래도 사회의 경쟁적 환경이 맞는 것 같아요. 그래서 선생님도 고등학교 때 인정을 갈망하신 거잖아요.

소현: 맞아. 이상적인 사회는 서로가 서로를 존중하면 되는 건데, 사회적 환경이라는 게 그걸 어렵게 만들지. 그래서 개인에게 스스로 먼저 성숙하라고 하는 것도 모순일 수 있어. 과연 존중은 개인의 차원에서 먼저 이루어지는 게 맞는가? 라는 질문을 해볼 수 있는 영화 ‘로제타’를 보고 얘기해 보자.

현우: 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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