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이야기 :: 부산행

좀비와 자본주의 의미 관계

by ANNQOO



노트북 바탕화면에 다양한 영화 제목의 문서 파일들이 돌아다닌다. 요 근래 찜해놓았던 영화들을 보면서 그때마다 정리해 놓은 주저리 파일들인데 하나같이 모두 마무리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문제다. 아. 그러고 보니 문제가 또 하나 있었다. 최근 글들이 어쩜 그렇게 외국영화만 있더라는 것. 물론 내가 해외직구를 사랑하고 미제라면 지나치게 몰두하는 경향이 있는 자칭 인터내셔널 스타일의 여성이기는 하나 영화만은 이렇게 편애하는 것은 안 될 일이다. 그래서 한국영화 중에 골라보자 한 이 영화. 바로 <부산행>이다.


이 영화는 사실 나에게 아주 의미가 있는 영화일 수밖에 없다. <부산행>이 개봉했던 2016년 7월의 어느 여름을 끝으로 나는 더 이상 극장에서의 영화 관람이 없었다는 충격적이고도 비통한 영화로 기억된다. 더 충격적인 사실은 뭐 딱히 특별한 사유가 있는 것도 아니라는 점이다. 바빴고, 바빴는데, 극장에서 보고 싶은 영화들은 너무 빨리 사라져 버렸고, 그런 데다가 KT의 VOD 시스템이 너무나 거룩하게 잘되어 있다는 이유뿐이다. (올레티비 포에버!)


한국형 좀비 영화라니,



아직도 기억이 난다. KTX의 통로에서 등산복 입은 한국인 좀비가 좀비 웨이브를 추며 쏟아져 나오는 CG 범벅의 티저를 보며 너무 어색해서 코웃음을 쳤던 순간이 말이다. 기껏 <월드워 Z>의 한 장면을 차용해 놓고선 ‘우리나라 CG도 이제 이 정도는 된답니다’라는 식의 발표회 같은 느낌이 들었던 건 어쩔 수가 없는 일이었다. 게다가 동양인 좀비라니, 좀비는 서양 태생이며 뭐랄까 그 서양의 산물적인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금발머리 서양 여자에게 소복을 입혀 무덤에서 울게 만들면 무섭겠냔 말이다. 그런데, 무서웠다. 증명이라도 하듯 아직까지도 KTX를 탈 때면 타고 내리는 승객들을 바라보며 영화 속 장면을 상상을 하게 만든다. 저 사람이 갑자기 나에게 달려들어 내 목덜미를 뜯어먹는 상상 같은 것 말이다.



영화 <부산행>이 좀비 블록버스터라는 영화적 장르를 타고 흥행에 성공한 것은 ‘한국형 좀비물’이라는 새로운 장르 개척에 있다. 흔히 좀비 매니아층이라 불리는 좀비 전문가들이 <부산행>이란 영화가 제작된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작품성에 대한 기대보다는 무시적 태도가 다분했었던 것은 일단 우리나라는 협소한 지리적 요소 탓에 좀비가 인간을 잡기 위해 뛰어놀만한 큰 스케일을 연출하기가 힘들다는 점이었는데, 블록버스터 영화에서 그것은 대체로 큰 핸디캡으로 작용하기 때문이었다. 물론 한국 영화 CG 기술에 대한 의문도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이 모든 예상을 뒤집으며 ‘한국형 좀비물’의 대표작이 된 <부산행> 이 우리나라 관객의 호평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은 외국의 좀비 영화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은유와 신파가 다분했기 때문이다. 좀비물에서 신파라니, 물론 정통 좀비 매니아들이 극도로 혐오하는 부분이긴 하지만 적어도 우리 국민 사이에서는 그야말로 좀비가 끓인 감동의 도가니인 것이다.


장소가 주는 친밀한 공포


이 영화에서 선택한 KTX라는 공간 선택은 탁월했다고 생각한다. 이 장소를 선택함으로 얻을 수 있는 많은 긍정적 효과들 중에서 뭐니 뭐니 해도 친숙한 장소를 이용한 공포심의 가중에 있을 것이다. 흔히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들과 친숙한 공간에서의 사건일 경우 감정 몰입에 더 개방적이며 잔상이 오래 남는 경우가 많다. 예컨대 내가 매일 다니던 우리 동네에서 벌어진 살인사건과 미국 플로리다 주 어느 마을에서 벌어진 살인사건의 체감이 다른 것처럼 말이다. 적어도 KTX를 한 번이라도 타 본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이 영화 안의 모든 구조와 공간의 형태, 그리고 모든 배경적인 요소에 있어서 어쩌면 그럴 수도 있는 일, 어쩌면 일어날 수 있는 일이란 마음으로 영화를 보았을 것이다. 감독은 일종의 의도적인 몰입을 유도하고 있는 것이다. 뿐만 아니다. 이 의도적 몰입을 위해 지속적으로 사용했던 장치가 재미있다. 재난의 상황에 처했을 때 그것도 그 재난이 ‘좀비’라는 괴물일 때의 국민들의 반응들, 좀비로 인식하지 못하거나 환자라고 생각하는 장면, 인터넷을 검색하거나 지인들에게 연락을 취하는 방식 등을 재치 있게 묘사하여 영화의 리얼리티를 살린다.




그러나 이러한 것은 우리나라 관객들에게만 해당되는 특수한 상황일 것이고 사실 KTX의 보편적 공포의 가중 효과는 기차가 주는 좁은 통로의 폐쇄성에 있다. 기차와 비행기 같은 소재는 다른 이동수단과 달리 한 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방향성이 있고 멈추거나 뛰어내릴 수가 없어 그 안에 갇혀있을 수밖에 없다는 장점(?) 이 이러한 장르에서는 효과적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갇힌 기차 통로에서의 유일한 피난처로 작용하는 열차 안 화장실은 자칫 한결같은 장소에서 발생하는 시각적인 단조로움을 극복할 수 있는 대처 방법이며 좁은 화장실 칸에 숨어서 코앞으로 좀비가 지나가는 모습을 입을 틀어막고 지켜보는 캐릭터들의 모습을 보며 관객들은 심장이 널뛰는 극한의 경험을 하게 된다.



좀비와 자본주의 습성


괴생물체나 귀신이 나오는 영화의 최종 목적은 그들이 인간에게 해를 가하여 결국 죽이는 것이다. 흡사 나 같은 조무래기 인간들은 그 괴물들을 피해 필사적으로 살아남기 위한 노력을 하다 대부분 죽어나가지만 각고의 노력 끝에 주인공은 웬만하면 살아남고 여유가 있다면 괴물들을 모두 무찌르기도 한다. 아, 그리고 시간이 허한다면 그 안에서의 사랑도 피어난다.

그런데 좀비는 그 습성이 달라서 해를 가하여 죽이는 것으로 종료되는 것이 아닌 동일한 좀비의 모습으로 분열을 해가는 것이다. 바로 증식이다. 좀비의 이러한 습성 때문인지 좀비 영화는 많은 평론가들 사이에서 자본주의적 습성으로 해석될 때가 많다. 좀비처럼 증식 한 거대한 자본주의 사회에서 살아남은 자본가들은 물질과 눈앞의 이익을 위해서는 물불 가리지 않고 달려드는 이른바 좀비 같은 인간이 되어버리고 있는 것이다. 영화 <부산행>에서 등장하는 주요 캐릭터인 서석우(공유)의 직업이 증권사 펀드매니저라는 직업으로 설정된 것도 그러한 이유였을 것이다. 영화에서 등장하는 다양한 캐릭터들-고등학교 야구부, 30대 부부, 노숙자, 50대 회사 간부, 60대 자매, KTX 직원들-을 계층적으로 분류한다면 지배층-중간계층-피지배층으로 나눌 수가 있고 대부분의 캐릭터들은 피지배층에 속하는 소위 사회적 약자(보통사람)에 속하지만 천리마 고속 상무(김의성)와 펀드매니저(공유)는 지배층에 속하는 계급으로 이기적 타산을 꾀하는 인물로 그려지고 있다. 지배층의 인물은 공동체 의식이 없고 남을 돕거나 헌신하는 것을 불필요히 여기는 지극히 이기적이고도 개인주의적인 면모를 보인다. 지배층에 위치하고 자본주의에 종속된 인간의 습성을 좀비에 비유하는 부분이 바로 이러한 부분인 것이다. 영화는 끊임없이 우리들에게 적어도 인간이라면, 최소한의 인간이라면, 이라는 전제를 달고 있는데 이와 같은 맥락으로 주인공 서석우의 시작은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지만 영혼 없이 살아가고 있는 좀비의 모습으로 그려지나, 시간이 지나며 점차 남을 위해 자신을 희생하는 법을 배우고 눈물을 흘릴 줄 아는 진짜 인간으로 거듭난다는 내용의 영화이다. 결국 영화는 좀비와 싸우는 인간의 생존 재난기를 표방하고 있지만 본질적 의미는 진짜 좀비 바이러스와의 싸움인 동시에 좀비와 다름없는 인간과의 싸움이다. 왼쪽 칸에는 좀비를 두고 오른쪽 칸에는 좀비와 다름없는 이기적인 인간들 사이에서 처연하게 버림받은 상황. 이러한 의미를 전달하기에 길다란 기차의 공간은 너무나 절묘한 장소인 것이다.



사회비판의 레퍼런스


우리나라는 영화 만들기 참 좋은 나라다. 풍자와 비판을 하기 위한 레퍼런스가 다분하기 때문이다. 뭐 그렇게 잘못한 일이 많은지 하여간 만들었다 하면 사회비판적 영화인 데다 심지어 자국민을 보호하지 못하는 무능한 정부의 스토리는 영화의 단골 소재이다. <부산행>에서 특히 기억에 남았던 연상적 대상은 역시나 세월호 사건을 다룬 부분이었다. 이미 고등학교 학생들이 단체로 나와 기차에 착석하는 모습을 보며 너무도 자연스레 세월호 사건을 떠올렸는데 좀비 즉, 재난의 상황에 첫 번째로 희생되는 열차칸의 대상을 아이들로 삼은 것이나 그 재난의 근본적 원인이 이기적인 어른들의 야욕 때문이라는 설정들이 세월호 참사를 생각나게 하는데 부족함이 없었다. “미안해, 나 빼고 다 못 탔어.” 라며 흐느끼는 고교생의 모습은 같은 반 친구들의 희생을 목격하고 혼자 살아남은 아이의 죄책감과 자괴감이 들어있는 대사인 것이다. 영화는 느리지만 아주 분명하게 세월호 속 아이들의 희생과 눈물들을 보여주는 컷들을 열거하고 있었다.



두꺼운 창문을 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결국엔 창문을 깨기 위해 망치까지 동원하며 고군분투하던 두 학생 중 여학생은 결국 천리마 고속 상무(김의성)의 이기적인 생존본능에 의해 상무를 대신하여 좀비의 희생량이 된다. 그리고 자신의 친구가 죽어가는 것을 보며 차마 친구를 두고 그 자리를 떠나지 못해 남은 친구도 죽음을 맞이한다. 매우 직접적인 세월호 시퀀스가 아닐까 조심스레 생각해본다. 어쩌면 눈물을 자아내기 충분한 장면이었을 것 같은데 눈물이 찔끔 나려다 멈춘 까닭은 내 정서가 메말라서인지 진희(안소희)의 좀비연기가 멋쩍어서 인지는 아직도 잘 모르겠다. 내친김에 안소희 씨 메소드 좀비 내면 연기도 함께 보시죠.(NOT Disrespect....kk)





어차피 신파는 각오하고 본 영화라 억지 신파에 대한 부분은 더 이상 언급하지 않겠지만 이 얘기는 꼭 하고 싶습니다. 좀비가 미소를 짓다니요. 아무리 그래도 순백 처리된 이 컷은 너무하지 않았나요? 헤헤

갑자기 공유가 찍은 분유광고 나온 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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