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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앤기자 Apr 05. 2021

"엄마, 이름은 왜 하나야?"

자유로운 영혼 대하는 방법

아이 세 살 때다.


"엄마 이름은 왜 하나야?"

"그러게, 이름이 여러 개면 부를 때 헷갈리지 않을까"

"난 이름이 많았으면 좋겠어"

"뭐하고 싶은데...?"

"큰 돌맹이?, 작은 튀김?"


그렇게 한 동안 아이 이름을 그때그때 부르고 싶은 이름으로 불러줬다.  


우리 아이는 보는 사람들은 하나 같이 '자유로운 영혼이군요'라는 말을 많이 한다. 자유도도 높고 생각하거나 하는 행동이 엉뚱하고 신기할 때가 많다.




아이는 자주 바닥에 누워 "엄마, 하늘 좀 봐, 하늘이 너무 예뻐" 그런다.


자유도가 높은 아이 대다수가 상상놀이 혹은 역할놀이를 좋아한다. 어떤 물건도 교구도, 어떤 장난감도 상상놀이에 도구일 뿐이다.


두 돌 때부터 어린이집을 다녀오면 어린이집에서 보고 들은 내용으로 역할 놀이를 하고는 했다. 인형들을 줄지어 놓고 선생님이 되어 아이들에게 애기하기 시작했는데 지금도 그런 놀이를 많이 한다. 그래서 본의 아니게, 어린이집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선생님이 무슨 말을 하고 아이들이 무슨 행동을 했는지 하루 있었던 일을 알 수 있다.


책을 읽고 나도 그 내용으로 상상놀이가 펼쳐진다. 아이는 <사자와 마녀 그리고 옷장>을 좋아했다. 하루에도 여러 번 읽어달래서 읽어주면 곧장 그 내용으로 상상놀이가 펼쳐진다. 영상을 봐도 마찬가지다. 영상에 스토리나 인상적인 부분을 가져와서는 상상놀이가 이어진다.


주변에 모든 것이 상상놀이에 도구다. 침대가 배가 되기도 하고, 택배 박스가 자동차가 되기도 한다. 굴러다니는 종이가 편지가 되기도 하고, 작은 운동기구가 음식이 되기도 한다. 가끔은 블록으로 생각한 모형을 구상하기도 하는데, 그 무엇이든 역할놀이에 도구가 된다.


혼자서 역할놀이에 몰입할 때도 있고 엄마가 참여를 요구할 때도 있다. 엄마는 손님이 되기도 하고, 환자가 되었다가, 의사가 되었다가 공룡이 되었다가 자동차가 되기도 한다.  


틀이나 경계가 없이 자신만에 상상력을 구상하기 때문에 정해진 활동을 하는 것이 어렵다. 자신이 하고자 하는 상상놀이나 의지를 방해할 때는 싫어한다.


예를 들어, 교구를 설명서처럼 하는 걸 거부한다. 자신에 스토리로 만드길 원하며, 교구 설명서 조차도 하나에 도구 일 뿐이다. 이런 연장선상에서 한글, 영어, 숫자 등 문자도 관심이 적고, 통제나 규제에 약하다. 문자도 하나에 틀로 생각하는 것 같다. 이런 것에 대해 강한 저항과 거부감을 느낄 수 있다.


주변에 모든 건 상상놀이에 재료가 된다


물론 어린이집에서 들으면 규칙을 잘 따르는데요?라고 하겠지만 그만큼 어떤 규칙이나 규율에서 자신을 맞춰가는 에너지가 큰 것이다. 그 긴장도나 스트레스는 하원 후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자연스러운 활동을 통해 풀어내고 자유를 충분히 만끽할 수 있도록 하고는 있다.


자유도가 높은 아이는 어떻게 해야 할까? 고민을 해 본 적이 많다. 사실 잘 모르겠다. 어떻게 해야 하기보다는 그냥 아이가 하고자 하는 것을 막지 않는 것 밖에 뭘 할 건 없어 보인다. 뭐든 자유롭게 하고 싶은 걸 그냥 놔둔다. 방행 하지 않고 부모가 의도를 가지고 이끌려고 하지 않고 자신이 의도하는 흐름데로 따라간다.


단지, 주변에 영유아 기관에 있던 선생님들 중에는 아이가 5살이 되자 앉아서 누구에 설명을 듣고 따라 하는 습관을 잠깐이라도 하면 좋다고 권하는 분도 있다. 아마 학교 들어가는 연습을 조금씩 하라는 의미인 듯하다. 자신에 의지로 책을 읽을 때는 한 시간도 거뜬히 앉아서 보기도 하지만 부모나 선생님이 뭔가 알려주려 할 때 거부하는 경우가 많다. 차차 자신에 때가 되면 하지 않을까 기다리고 있다.  


자유도가 높아 상상놀이에 빠져 있다 보면 사회성이 떨어질 때가 있다. 재작년 코로나로 어린이집도 가지 않고, 집에서 엄마하고 단 둘이 2개월 정도 생활하다가 처음 친구를 만난 적이 있다. 코로나가 처음 유행할 때라 서로가 조심할 때였다. 2개월 간 집에서 혹은 사람이 없는 곳을 산책하며 상상놀이만 쭉 했다. 밥 먹고 상상놀이, 책 읽고 책 내용으로 상상놀이 그러다 보니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와 교류를 하기보다는 자신에 상상놀이를 빠져서 그것을 친구에게 강요하는 것이다.


친구와 킥보드를 타고 노는데 허공에 손으로 구획을 그어놓고는 "여긴 내가 만든 성이니깐 여기서부터는 이렇게 돌아가야 해" 이런 식이다. 친구가 놀 수가 없었다. 가는 곳마다 "이쪽은 안돼", "이쪽은 내가 만든 곳이야" 부딪힘이 있다.


코로나 이전에 하원 후 친구들과 놀면서 장난감 등으로 갈등이야 늘 있지만 그래도 상호작용을 하든 각자 놀든 뭔가 흐름이 있었다. 코로나가 시작된 이후 친구를 만나지 못하고 몇 달만에 한 번씩 사람을 만나면 자신에 생각 속에 있는 경우를 자주 봤다.


역할놀이나 상상놀이에 빠져 친구와 놀 때도 자신만에 생각에 매몰되어 친구에 공간을 인정해 주지 않고, 혹은 상호작용을 하지 않고 자신에 상상을 강요하는 건 사회성이 떨어지고 자신만에 세계에 들어간 건지 의문이 많이 들었다.


한편, 자유도가 높고 틀이나 경계가 없다 보니 놀이가 엉뚱하고 재미있다. 아이들 사이에서 아이가 권한 놀이가 재미있을 경우가 많다. 부모도 재미있다. 그래서 놀이를 주도할 때가 있다.


어린이집에서도 즉흥적으로 재미있는 놀이를 해서 친구들이 재미있어하고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고 한다. 하루는 집에서 색종이를 세 번 접어 자기 이름표를 붙인다. 한 장, 한 장 만들더니 그걸 20장 정도 챙긴다. 그러더니 "이건 엄마 꺼, 이건 아빠 꺼 그리고 친구 00이 꺼..." 어린이집 등원 때 그 편지를 가져간다. 친구들에게 편지를 나눠주겠다는 것이다. 하원 때 선생님이 크게 웃는다. "친구들 한 명 한 명에게 즉석에서 편지를 읽으며 다 나눴어요. 매일 하나씩 뭔가 가져와서 이벤트를 하니깐 재미있어요" 어린이집 선생님도 아이가 하는 걸 막거나 제지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받아주니 감사하다는 생각을 한다.  


반면에 어떤 아이들은 교구나 장난감, 혹은 도구를 그 쓰임새로만 꼭 쓰려고 하는 친구들도 있다고 한다. 이런 친구들은 반대로 그 쓰임을 다르게 하면 인정하지 못하고 힘들어한다고. 아마 주어진 어떤 틀 데로 하는 것에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아이들은 정말 다 다르다. 아이들은 다듬어지지 않은 원석 같다. 자유도가 높던, 틀이 강하던 타고난 아이에 모습을 인정하고 지켜봐 주며 환경을 제공하는 건 중요한 것 같다. 아이에 맞게 믿고 기다려주면 스스로 각자의 길을 걸어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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