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정엄마도 함께하는 발리에서 한 달 살기
친정살이를 하다가...
아이와 떠나기로 마음을 정했던 때는 내가 친정살이를 하고 있을 때였다. 이대리(남편)의 갑작스러운 해외 장기 출장으로 채 백일도 안 된 아이와 나는 피난가듯(?) 친정집에 바리바리 짐을 싸들고 오게 되었다.
친정엄마와의 생활은 말 그대로 천국이었다. 숨 돌릴 틈, 낮잠잘 틈, 운동할 틈, 그리고 혼자 카페에서 커피를 마실 수 있는 틈이 생긴다는 것은 매우 큰 축복이자 천국과도 같기에.
그러나 여느 모녀와 같이 티키타카로 주고받는 사소한 말다툼(예를 들면 애가 추우니 옷을 입혀라 vs 태열이 올라오니 옷을 벗겨야 한다x100의 무한반복) 같은 건 과년한 딸에겐 잔소리로 들릴 수 밖에 없어 가끔은 조금 지치기도 했다.
아무튼 친정살이의 끝물, 본격 취업에 대한 마음을 정리하고 엄마에게 나의 원대한 계획을 말했다. 사실 분명 혼날 거라 생각했기에 큰 맘 먹고 진지열매를 먹어가며 운을 띄웠는데, 뜻 밖의 대답이 돌아왔다.
"나도 같이 가도 되나?"
예전의 엄마가 아니야!
엄마와 함께 여행을 다녀온 게 벌써 5년 전 홍콩여행이었다.
지금 생각해도 울컥한 순간이 있었는데, 후덥지근한 홍콩의 한 골목에서 란퐁유엔을 찾지 못해 짜증이 가득한 상태로 있는 내게, 평소 같았으면 잔소리 융단폭격을 내렸을 엄마가 가만히 지켜만 보고 있었다. 짜증이 조금 가라 앉은 후 엄마에게 '왠일로 가만히 계셨수'하고 묻자, 엄마는 말했다.
"영어도 못하는데 너가 두고 가면 안 되잖아"
더 이상 말을 할 수 없었다. 지금도 누군가에게 가끔 이 얘기를 할 때마다 목이 콱 막히고 눈물이 날 것 같아 먼 산을 보고 말한다. 아니 근데 엄마 왜 나를 나쁜 X으로 만들구 그래.........
하지만 엄마가 달라졌다.
작년부터 엄마는 영어공부를 시작했다. 옛날부터 봐 온 엄마는 무언가에 꽂히면 끝장을 보는 성격이었다. 동생과 나를 키우면서도 시간을 쪼개 평생대학원을 다니며 피아노 공부를 하여 결국 가정 피아노 선생님이 되었고, 베이킹에 꽂혔을 땐 엄마가 곧 빵집을 내는 줄만 알았다. 거진 10년째 하고 있는 수영이야 말할 것도 없구.
그리고 요 몇 년 사이 친구들과 해외여행을 다녀오더니 어느 날 부터 집 앞 동사무소의 영어수업을 열심히 다니기 시작했다.
친정에 있는 동안 지켜본 엄마는 하루 왠종일 영어와 함께 했다. 아침 5시경 기상해 아빠와 동생을 출근시키고, 6시부터 8시까지 EBS2에서 방영하는 각종 영어 프로그램을 집중해서 듣는다. (이 시간엔 나나도 숨 조차 쉴 수 없다ㅋㅋㅋ할미의 영어수업을 방해하면 큰일나니까) 아침운동을 마친 엄마는 또 공부하고 있는 영어동화책 음원을 반복, 또 반복해서 외울 때 까지 듣는다. 물론 입 밖으로 수십 번 리딩하는 건 말할 것도 없고. 친정아빠와 동생은 이미 이골이 난 듯 (공부 안하는 사람에게는 소음이니까...), 하루 종일 영어로 시작해서 영어로 끝나는 일상이었다.
엄마는 그렇게 2년을 꾸준히 공부해왔고 이제 입 밖으로 내뱉는 순간만 염원해왔는데,
마침 딸이 아일 데리고 떠나겠다고 미끼를 던지니 냉큼 물어버린 것이다.
즉, 이번 여행은 엄마의 영어활용 첫 데뷔무대!
챙겨야 할 몫이 늘었지만.
두 사람을 책임져야 한다는 막중한 책임감과 동시에 마음 놓고 떠날 수 있다는 당위성이 생겼다. 누군가 '엄마 좋자고 떠나는 여행'이라고 말한다면 나는 '울엄마'라는 디펜스를 사용할 수 있을 것 같은 당위성. 동시에 나의 보호자였던 엄마를, 그리고 내가 보호자인 아기까지 둘의 몫을 더 챙겨야 한다.
내가 먼저가 아니라 친정엄마와 아기가 우선이 되어 생각해야 할 것이고 결정해야 할 것이다.
앞으로의 여행준비 내용도 혼자 떠나는 여행보다는 함께 떠나는 여행에 대한 정보가 주를 이룰 것 같다.
아무튼 나, 이 여행 잘 할 수 있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