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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Annie Jeong Nov 06. 2018

1편 :: 도착했다, 지진과 함께.

9개월 아기와 친정엄마를 데리고 떠난 발리 한달살기

시작 전 ::
대개 여행을 다녀온 후엔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지난 여행을 곱씹어보는 편이다. 하지만 이번 여행은 아기의 컨디션에 온 정신을 쏟는 데 바빴고 뒤늦게 정신을 차린 나는 찬 바람과 가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인천공항에 ‘내려져 버렸다’는표현이 맞을 것 같아. 현생이 바빠 일주일이 훌쩍 지나고서야 되돌아보는 지난 한 달은, 현실이었지만 꿈이었다. 사실 떠나기 전에 정말 발리의 모든 것을 정복하고 가겠다는 굳은 다짐으로 엄청난 계획을 빽빽이 세웠더랬다. 그러나 아기와의 한 달은 매우 느린 호흡으로 숨을 내쉬는 시간이었다. 그런 하루들을 하나씩 곱씹어 보면 참 별 것 없던 시간들이 모여 보석 같은 꿈을 만들어 냈다. 결국 나는 다녀왔고, 아이는 건강하고, 우린 남들과는 다른 기록을 만들어 낸 것이다.

“빠뜨린 거 없지?”

새벽같이 일어나 나와 아이의 짐을 싣으며 남편은 조심히 잘 다녀오라 말했다. 첫 일주일은 친정부모님과 함께여서 걱정을 좀 덜긴 했지만 그럼에도 그의 머릿속엔 나와 우리 아기의 안위가 맴돌 것이다. 물론 출국 후엔 밀린 늦잠과 게으름을 피울 수 있기에 좀처럼 내려오지 않는 입꼬리도 언뜻 본 것 같지만. 



전 날 까지도 챙겨야 할 짐과 목록을 곱씹고 다시 한번 뒤적이며 짐을 추렸다. 

28리터 크기의 트렁크가 가득 찼고, 20리터짜리 기내용 트렁크엔 아기의 책과 장난감이 듬성듬성 들어 있었다. 그리고 기내에 메고 탈, 아기의 음식과 옷, 기저귀를 가득 채운 2박 3 일용 배낭까지. 생각보다 짐의 양이 적었다. 그중 가장 큰 트렁크의 절반은 지후가 먹을 음식과 관련 용품이었기에 내 생활에 필요한 물건은 없다시피 했다. 


없으면 없는 대로 살고, 옷이 모자라면 사 입고, 먹을 건 김치 좀 참고 안 먹으면 되고 그러면 되지. 



그리고 언제나처럼 기상 시각이 정확한 아들 덕에 여유롭게 공항에 도착했다. 먼저 도착한 친정부모님과 함께 체크인 수속을 밟았다. 다행히 연휴 직후라 좌석이 많이 빈 상태였고, 덕분에 베시넷과 블록 자리를 모두 받을 수 있었다. 아이의 컨디션도 그렇지만 주변 사람에게 민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아니, 사실 아기와 함께 비행을 하는 게 민폐는 아니지. 하지만 '저 아기가 우리의 즐거운 여행의 시작에서 내내 울어 젖히면 어쩌지?' 하는 왜 그런 따가운 눈총과 시선을 피할 수 없다는 건 잘 안다. 죄인이 아닌데 죄인이 된 마음이 든다. 

이 놈의 나라는 애 낳으라고 하면서 떠나기 직전까지 왜 이렇게 자꾸 사람을 움츠리게 만드는 거야. 

아무튼 적어도 사방은 우리 가족이니 한 시름 덜었다.



탑승동 앞에 수유실이 있다고 했으나 키즈존을 뜻한 건지 수유실은 따로 보이지 않았다. 급한 대로 화장실로 뛰어가 지후의 기저귀를 갈아 채웠다. 아침 6시에 일어난 아기는 공항의 낯선 내음과 분위기 때문인지 영 잠에 들지 못하다가 게이트 앞에 와서야 무거운 눈꺼풀을 끔뻑거리기 시작했다. 

그래, 차라리 지금 자는 게 낫겠다 지후야, 비행기가 뜨면 귀가 아플지도 모르니까. 

아이는 좌석에 자리를 잡자마자 내 품에 폭 파묻혀 잠들었다. 비행기가 뜨고도 한참을 그렇게 잠들었기에 설치된 베시넷에 아이를 차마 눕힐 수 없었다. 그냥 안고 가는 편이 나았다. 혹시 다가올 터뷸런스 때마다 아기를 꺼내느니 그냥 내 품에서 푹 재우는 게 나을 것 같아. 

비행기에서 아기는 두 번의 낮잠을 잤고 나머지 시간은 베시넷과 내 품을 왔다 갔다 거리며 단 한 번의 칭얼거림 없이 비행기 안에서 잘 놀아 주었다. 출발 전부터 설사 기운이 있었기에 분유 대신 전 날 쌀을 불려 끓인 흰 미음을 먹이며 왔다. 맛있는 음식도 많은데 자꾸 흰 미음만 주니 짜증 날 법도 한데 지후는 내내 생글거리며 신나 했다.



비행기는 제 자리에서 몇 번을 빙글거리며 좀처럼 착륙할 생각을 하지 않았다. 

무슨 일이 있는 건지, 관제탑의 신호를 받지 못한 건지. 

애꿎은 화면만 꾹꾹 눌러대며 착륙시간을 확인해댔다. 

그렇게 도착한 응우라 라이 국제공항. 

도착하자마자 핸드폰이 쉴 새 없이 울리기 시작한다. 

' 뭐 외교부나 통신사에서 쏟아질 듯이 밀어내는 안내 문자겠지...' 싶어 열어본 핸드폰에 뜬 문자 하나.




"9.28, 19:02경 미나하사 7.5 지진, 여진 쓰나미 우려 안전유의"



발리, 안녕하세요!

#발리한달살기 #아기와해외여행 #육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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