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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May 15. 2021

철 없는 이의 지중해 읽기

지중해기행 l 카잔차키스


카잔차키스를 읽어가는 일은 고통스럽다. 

그의 인간에 대한 탐구와 시대에 대한 비판과 종교에 대한 원망이 머리 속을 헤집어놓는다. 19세기 역사 지식을 총동원해도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두 손 두 발 다 들었다. 나는 나라를 위해, 이념을 위해 싸우거나 고민해 본 기억이 없다. 걱정도 하고 원망도 하지만 언제나 내 안의 세계에서 한 발도 내딛고 나아가지 못했다. 내 눈은 지중해를 여행하며 바다의 푸른 빛과 대지의 화려함만 가득 채우고 시리아 난민을 향한 눈물은 흘리지 않을 만큼 철없다. 나는 감히 그가 품은 고뇌를 이해하지 못한다.


내 지식과 세계관은 지중해를 향해 떠나는 배에 무임승차하여 부끄러움을 벗어보려 애썼다. 평생 사상과 종교를 떠돌아다니는 영혼의 방랑자에게 기대어 작은 깨달음이라도 얻어볼 수 있을까? 아무 생각도 맺지 못한 채 반항과 순종의 줄타기로 청춘을 보낸 지난 시간이 원망스럽다. 기독교에 대해 반문도 하지 않던 내가 카잔차키스의 글 속에서 나를 의심한다. 카잔차키스는 어떤 사상과 종교 위에 자신의 가치를 바라보았는가. 


프란체스코와 무솔리니를 바라보는 그의 시선은 이상(裡想)에 대한 신념을 향한다. 종교와 정치의 방향은 인간의 정신을 촉발시키는 엄청난 고양에 있다. 카잔차키스는 청빈, 순종, 순결의 덕목도 인간의 영혼을 구원할 광기가 담겨 있으며, 죽음을 각오하고 자신을 끊임 없이 밀어 붙이는 비극적인 독재자의 운명도 자신을 능가하는 힘에서 촉발된다고 본다. 그는 이집트를 여행하며 신을 끌어오는 인간의 영혼이 오히려 굴욕을 당한다고 느낀다. 종교에 대한 왜곡된 신념에서 벗어나 인간의 정신이 물질을 지배하여 하나의 본질로 승화되는 이상향을 꿈꾼다. 


친애하는 몬티타에게 보내는 [편지]는 지중해 기행의 주제가 되어 카잔차키스가 가진 세계관을 그대로 드러낸다. 사막과 초원을 가르는 경계를 묘사하며 사막에 굴복하지 않는 녹색 풀잎이 우리의 <의무>며 현대인의 자리라고 선언한다. 그의 글은 광야를 행군했던 3천 년 전의 심장에 이입되어 "침착하고 조용하게, 희망과 두려움을 모두 버리고 그 깊은 균열을 바라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고 결론 내린다. <불꽃이 이는데도 타지 않는 떨기 수풀> 은 인간의 영혼이니 신의 이름에 호소하지 않겠다는 그의 고집스러운 의지는 어디에서 시작된 것인지 나는 몹시 궁금해졌다.


예루살렘을 여행하는 그의 눈에 분노가 가득하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말씀은 효력이 상실되었으니 진실 하려는 의지가 없는 <성주간>은 무슨 의미가 있는가? 어둠 속에서 손녀에게 전해주는 할머니의 예수의 수난이야기가 오히려 하나의 신화가 되는 것을 본다. 카잔차키스는 하나님과 그리스도에게 화를 내고 있는 것이 아니다. 종교를 만들어 인간을 속박하는 권력과 조종을 일삼은 자들에게 분노하고 있다. 부활절 오후, 아토스 산 위 자신의 문간에서 주님을 맞이하고 싶은 그의 갈망은 처절하다. 두 진영 사이에서 전쟁을 벌이며 석 달을 보낸 그는 자신 속의 목소리와 대화한다. 


예수는 내 영혼을 구해줄 수 없다고, 나는 살과 진흙과 정신이 모두 합쳐진 존재이자, 인간이라 고, 그는 끝까지 지켜보는 <눈>에게 부르짖는다. 그러나 <눈>은 말한다. "나는 너에게 요구하는 것이 아니야! 난 네 속에 있어. ... 나는 소멸되지 않지만 너는 떠나게 되어있지. ... 존재하는 것은 오직 나뿐이야!" 그는 묻는다. "너는 누구지?" <눈>이 조소하고 탄식하며 사라지고 그는 여행을 계속한다.


카잔차키스는 두 번의 세계대전을 경험하고 아시아까지 여행한 후 환갑이 넘은 나이에 사회당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그는 계속 저작활동에 몰입하였고 육신의 병으로 고생하다 74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나는 아무것도 바라지 않는다. 나는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나는 자유다." 라고 새겨진 그의 묘비는 바다가 보이는 크레타 섬의 한 언덕에 소박하게 뉘어져 있다.


태평한 여행자는 크레타 섬에 가보고 싶다. 그리스정교회가 거부한 그의 시신이 쉬고 있는 그 언덕에서 지중해를 바라보아도 나의 철 없는 영혼은 <아무것도> 건드릴 수 없었던 그의 <자유>가 무엇인지 알지 못할 것이다. 카잔차키스의 사상의 한 점에도 나는 의지를 가지며 살아내지 못했다. 그가 만난 <눈>이 나에게 자유를 주는 구원이었다는 것만 희미하게 느낄 뿐이다. 인간이라고 부르짖으며 의지를 내보려 할 수록 괴로워졌던 인생을 나는 계속하고 있다. 그의 글 속에서 찾아낸 의지가 믿음을 구하는 내 의지 보다 가치 있는 것인지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는 과연 믿음 외에 <아무것도> 바라지 않으며 믿음 때문에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는지 의심한다. 전혀 자유롭지 않은 삶 속에서 <자유>를 선언할 때까지 쭉 계속 할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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