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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n 09. 2021

글로 듣는 음악

오자와 세이지씨와 음악을 이야기하다 / 무라카미 하루키


몸은 시간을 기억한다. 


누군가는 눈으로 또 누군가는 귀로 그 시간을 몸에 저장한다. 나의 몸은 차이코프스키를 처음 들은 날을 기억하고 있다. 지방에 계신 아버지께서 오시면 거실의 전축이 깨어났다. 우리 방은 창호지를 바른 네 쪽짜리 미닫이 문이 거실과 마주하고 있었는데 방에 불이 꺼지면 창호지 문 위로 아버지의 실루엣이 보였다. 


전축에 조심스레 레코드를 올려 놓고 파이프 담배를 물고 거실 쇼파에 앉은 아버지의 옆 모습. 현악기의 흐느끼는 울림이 이어지고 관악기들이 바람처럼 휘돌아가면 이어지는 피아노 독주가 선명한 빛이 되어 담장 넘고 밤하늘로 솟아 오른다. 오케스트라의 선율은 고조되고 문 너머의 내 가슴은 팀파니처럼 쿵쾅거린다. 이런 날은 음악이 끝나고 거실의 불이 꺼져도 한참 동안 잠들지 못했다. 8살 소녀 속으로 음악이 들어 왔다.


이렇게 시작 된 클래식 입문은 베토벤과 모짤트가 다르고 카랴얀과 번스타인이 다른 것을 구별하게 되었다.


이용의 잊혀진 계절도 좋았고 김현식의 비처럼 음악처럼도 좋았다. 간간히 보낸 내 엽서가 DJ아저씨의 목소리로 읽혀질까 밤 마다 라디오를 끌어 안고 두근두근하며 기다리던 때도 있었다. 그런데 그 시간의 기억은 머리에만 남아 있을 뿐, 몸에 남아 있는 것은 고전음악이니 신기하다. 내가 하루키의 글에 푹 빠지게 된 이유 중 하나도 재즈와 클래식이 글 속에 자연스럽고 깊이 있게 그려져 있기 때문은 아닐까.


하루키가 최고의 지휘자 세이지와 음악이야기를 했다. 


함께 베토벤과 브람스를 듣고 말러를 들으면서 악보의 음악이 소리로 완성되는 과정을 수다스럽게 이야기한다. 하루키는 글의 리듬이 없으면 아무도 읽지 않는 글이 된단다. 음악에서 글 쓰는 것을 배운 현존하는 최고의 작가는 읽는 이를 앞으로 보내는 내재적 율동감을 문학의 힘이라고 하더니 세이지는 한 술 더 떠서 음악에서 귀가 발달했다는 것은 자음과 모음을 컨트롤 한다는 것이란다. 


이 두 남자들은 분명 자신의 일에 미쳐있다. 


하긴 아직 글 쓰는 것에 빠져보지도 음악에 미쳐보지도 못한 풋내기도 어릴 때부터 들은 음악 덕분에 글 쓰는 것과 음악은 같은 것이라는 말에 백배 동감한다. 음악은 기본적으로 단어가 모여 문장을 이루고 문장이 모여 문단을 이루는 글쓰기와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다. 기승전결의 스토리 구조를 플롯이라고 하는 것처럼 음악도 크게 악장으로 나눠지고 한 악장도 비슷한 구조를 가지고 이야기처럼 음을 이끌고 간다.


단어의 조합, 문장의 조합, 문단의 조합, 딱딱함과 부드러움, 무거움과 가벼움의 조합, 균형과 불균형의 조합, 문장부호의 조합, 톤의 조합에 의해 리듬이 생긴다는 하루키가 말한다. 




"나는 재즈를 좋아하니까, 그렇게 리듬을 확실하게 만들어놓고 거기에 코드를 얹어서 임프로비제이션을 시작한단 말이죠. 자유롭게 즉흥을 해나가는 겁니다. 음악을 만들 때하고 같은 요령으로 글을 씁니다." 


재즈든지 클래식이든지 하물며 대중음악이라 할지라도 글과 비슷하다. 


무거운 대하소설이나 수필이나 시가 다른 것처럼 음악의 분야도 그러하다. 대하소설은 감히 손 대지 못하는 나도 클래식을 이야기하면 전혀 모르는 세계라고 고개를 돌리는 사람을 이해할 수 있다. 글을 받아 들이는 몸이 다르듯 음을 받아들이는 몸도 다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마음의 가능성을 닫고 있다면 몸의 가능성은 넓어지지 않는다. 우리가 쉬운 리듬을 쉽게 몸으로 느끼고 즐기듯 음악은 리듬과 음에 몸을 얹어놓는 것이다. 단 귀를 열어야 한다. 들으려는 의지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느끼려는 마음을 열면 귀가 열리고 음을 받아들일 수 있다.


글을 읽고 쓰는 때도 마찬가지다. 


삶의 배경과 개인의 취향을 넘어 누군가의 글에 귀를 기울이는 마음이 책을 읽게 해주고 새로운 세상을 보게 되는 것과 같다. 하루키는 스위스의 한 마을에서 세이지가 참여하여 오케스트라를 이뤄가는 과정을 경험한다.




 "어느 순간, 맑은 여름 햇살 아래 그들 사이에서 뭔가가 소리 없이 스파크를 일으킨 듯 했다. 그들은 단순히 자신의 연주를 하는 데 그치지 않고 '서로의 연주를 듣게' 된 듯했다. 물론 완벽한 연주는 아니었다. 더 깊이 성숙될 여지는 아직 남아 있었다. 하지만 진정한 '좋은 음악'이 가지고 있어야 할 흐르는 듯한 긴박감이 분명히 감돌고 있었다. 그들은 말 그대로 하루하루 구심력을 습득해 갔다. 신종 동물 하나가 무명의 세계에 탄생한 것 같았다. 그들은 커뮤니케이션을 한다는 행위 자체에서 음악의 풍요로운 의미를, 자연스러운 기쁨을 찾아내기 시작한 듯했다."


여덟 살의 내가 받아들인 음악은 그런 것이었다. 


자연스러운 기쁨이었다. 몸이 느끼는 즐거움이며 지식이 필요 없는 갈망과 같았다. 이제 길고 긴 시간이 지나 내가 써내고 싶은 글도 그런 것이다. 몸이 말하는 이야기, 지식이 없어도 읽어지며 삶이 있으면 받아들여지는 이야기를 쓰기 원한다. 어떤 책들은 리듬 없는 글처럼 다만 읽어내야만 하는 지식으로 쌓여져 때로는 힘든 삶에 무게를 더할 뿐이다.




"듀크 엘링턴의 말처럼 세상에는 '멋진 음악'과 '그렇게 멋지지는 않는 음악', 이렇게 두 종류의 음악이 있는 것이지, 재즈가 됐건 클래식이 됐건 원리는 다르지 않다. '멋진 음악'을 들어서 얻는 순수한 기쁨은 장르를 초월하는 곳에 존재한다."


하루키의 이야기에 힘을 내어 순수한 기쁨을 주는 '멋진 글'을 위해 오늘도 두들긴다. 

"Punch the keys for the st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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