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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은륜 Jun 08. 2021

여섯 개의 발톱을 빼버린 그녀의 와일드

와일드 / 셰릴 스트레이드



발톱 하나도 빠져 본 적 없는 내가 상한 발톱 뽑는 고통을 상상하는 것으로 충분했다. 


철저히 혼자가 되는 것을 상상만하던 아줌마가 외로운 여인의 길을 읽어볼 이유가 되었다. 몸을 세워 일어설 수 없을 만큼 무거운 배낭을 등에 진 여자의 모습을 그려 본다. 먼지와 땀과 때로는 비와 갈증에 뒤범벅이 된 얼굴과 푸른 눈동자를 생각해 본다. 왜 그래야 했는지 모른다. 다만 길 위에 놓인 한 젊은 여자의 몸만 그려 볼 뿐이다.


자신에게 스트레이드라는 이름을 새로 지어주고 스스로를 길 위에 올려 놓은 여자가 있다. 


그녀는 길을 마치고 ‘신들의 다리’ 앞에 이르러서야 왜 걸어야 했는지 이유를 보았다. 자신이 정한 그 곳에 와서야 깨달았다. 그녀의 길은, 그리고 그녀가 걸어간 모든 시간은 닫혀 있던 삶과 시간을 펼쳐 진정한 용서와 화해에 닿게 했다. 모든 삶을 잃었다고 흘렸던 눈물이 모든 것을 잃음으로 찾게 된 사랑으로 돌아와 있었다.


나는 나 자신을 위해 살아본 적이 한번도 없어.


죽음 문턱에서 고백하는 엄마의 손을 눈물로 만져 주는 것 말고 딸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갑자기 죽어버린 엄마는 그녀 세상의 일부였다. 미네소타 촌구석에서 가난하게 살던 그녀의 엄마는 특별히 존경할 만한 인물은 아니었다. 행복이 뭔지 맛보게 해 준 부모는 더더욱 아니었다. 그러나 그녀에게 엄마는 에너지의 근원이었다. 엄마를 잃은 후 자신을 내어 던지는 그녀의 모습은 남편의 사랑으로도 채워질 수 없는 갑자기 말라버린 우물 같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싶은 마음을 안다. 


내 힘으로 돌이킬 수 없는 인생들과 엉켜진 실타래처럼 답답한 삶이 있다. 풀려 해도 다시 엉켜버리고 마는 그런 시간 말이다. 몸을 던져 도망쳐 버린 곳은 자신을 잃게 만들었다. 지워 보려던 슬픔이 더 진해지는 한 가운데서 길을 바라본다. The Pacific Crest Trail. 일명 PCT는 그녀를 배낭 하나에 의지하여 매달리는 삶에 들어가게 했다.


하루키의 글이 떠오른다. 



"제로의 지평에서 뭔가를 만들어내려면 개인적이고 심도 있는 집중이 필요한데, 개인적이고 심도 있는 집중은 많은 경우 타인과 협조하는 것과는 무관한, 굳이 말하자면 초인간적인 부분에서 진행되기 때문이다."  



창작을 위한 문학이나 예술도 인생의 한 은유가 아니겠는가. 괴물 같은 인생처럼 두렵게 몸을 눌러댈지라도 버릴 수 없는 짐에게 그녀 몬스터라는 이름 붙여주고 여행을 시작한다.


4,285km 자동차로 달리는 길이 아니다. 


미국 서부의 등줄기, 시에라네바다 산맥과 캐스케이드 산맥을 따라 걷는다. 사막과 황무지와 눈과 얼음이 그녀를 기다린다. 모기와 방울뱀과 코요테와 곰이 조연으로 등장한다. 주인공은 매일 배 고프고 목 마르고 며칠 동안 오줌 한 방울 나오지 않는 혹독한 생존 무대 위에 있다. 막이 바뀔 때마다 검게 변해 버린 발톱을 하나씩 빼가며 길과 자신의 스코어를 기록한다. 최종 스코어는 6:4. 빠진 발톱 여섯 개, 남아 있는 발톱 4개. PCT 승.


마흔다섯에 죽어버린 엄마, 도망칠 수 밖에 없던 때리는 아버지, 캠핑을 가르쳐 주었지만 함께 살 수 없었던 의붓아버지, 엄마의 죽음 앞에 흩어져 버린 언니와 남동생, 자신을 허물어버리고 싶을 때 만난 마약과 마약 같았던 정부, 어린 나이에 만나 결혼했고 사랑하지만 놓아 버릴 수 밖에 없는 남편. 


그들은 등산화 속에서 고통으로 울부짖는 그녀의 발에 붙어 있는 발톱이다. 산타의 선물 같은 새 등산화로 갈아 신어도 발의 통증은 사라지지 않는다. 마치 저주에 걸린 것 같다고 그녀는 생각했다. 발톱을 하나씩 뽑을 때마다 하나의 존재와 화해하고 용서라는 새 살 위에 다시 자랄 발톱을 기다리며 다시 등산화를 신는 여자를 그려본다. 


나는 진정 그녀의 발을 응원했다.


그녀는 가난했다. 냄새 나는 몸을 부끄러워하기보다 굶주리고 목마른 몸을 먼저 채워야 했다. 단 2센트를 주머니에 넣고 걸어가야 하는 100km의 길에서도 철저하게 혼자였다. 아무도 만나지 못하고 누구의 목소리도 듣지 못하고 어떤 눈빛도 보지 못한 시간이 일주일이 넘고 또 넘어간다. 우연히 만난 이들과의 헤어짐이 되풀이 된다. 다시 혼자의 길을 가고 생명의 위협에 부딪히고 또 살아나고 하루가 저무는 날들이 이어진다. 길의 끝에서 정말 중요한 것들이 무엇인지를 깨닫는다. '신들의 다리' 위에서 이제 더 이상 텅 빈 손을 휘저을 필요가 없다는 사실을 믿는다. 예측 불허함을 그대로 내버려둘 수 밖에 없어도 고귀한 것이 자신의 인생이었음을.


Wild한 시간 속으로 들어가서 12,000km의 실크로드를 혼자 걸은 베르나르 올리비에 할아버지도 한 마디 하신다. 



"네 번의 장 기간 도보여행을 하면서 내게도 믿는 구석이 생겼다. 고된 여행일수록 거짓과 위선보다는 내밀한 진실이 더 많이 존재한다는 것을. 그리고 세계가 품고 있는 거대한 신비를 더 많이 맞닥뜨리고, 진실한 만남이 이루어지는 기적의 시간을 더 많이 갖게 된다는 것을."  


나도 새로운 길에 떠날 시간을 기다린다. 짐을 싸게 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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