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드니 / 무라카미 하루키
북한강자전거길을 처음 완주한 날, 나는 달라졌다. 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동안 온 몸의 근육에 집중하고 페달의 회전에 몰입했다. 그 날 저녁 어둑해진 동작대교 남단에 도착했을 때, 내 심장은 다시 태어나 있었다. 마라톤을 완주하면 이런 기분일 것 같았다. 달려가는 거리가 늘어갈 때 마다 내 허벅지는 점점 강해졌고, 4대강자전거길을 완주한 몸이 되었다. 오래 달리는 힘을 느껴보니 다른 운동들도 예사롭게 보이지 않았다. 자전거의 두 바퀴에 의지해 달려가는 라이더에게 맨 몸으로 42.195킬로미터를 완주하는 마라토너의 심장은 선망의 대상이다. 마라톤은 지루하게 반복되는 단순한 동작으로 이루어진 가장 원초적인 운동이니까.
마라톤 경기를 처음 보았을 때의 느낌이 아직도 생생하다. 서울올림픽 마지막 날이었다. 한강 주변에 살던 나는 집 앞으로 남자마라톤 선수들이 지나간다는 소식을 듣고 좋은 자리를 잡고 목을 빼고 기다렸다. 코너 끝에서 선수들이 보이기 시작했다. 박수를 치며 환호하는 사람들 사이로 점점 다가오는 다리들. 나는 눈을 뗄 수 없었다. 그것은 이제까지 내가 알던 사람의 다리가 아니었다. 근육의 가장 순수한 부분만 남아 뼈를 감싸고 있는, 피부 아래 감춰져 단단하게 고정된 움직이는 기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달리는 선수들의 두 눈동자는 흔들리지 않는 빛으로 선명했다.
리우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시드니』를 처음 읽었다. 나는 당시 폭염 중에 라이딩을 하다가 탈진을 경험했고 처음으로 완주에 실패한 직후였다. ‘이제 내 몸은 더 이상 달릴 수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으로 우울했었다. 지루한 여름 더위의 막바지에 마루바닥 위를 뒹굴며, 낮에는 책 속의 올림픽을 읽고 밤에는 박인비 선수의 골프 경기를 보며 잠을 청했다. 누워서 지루한 골프 중계를 보는 것은 내가 추천하는 달콤하게 잠드는 최고의 방법이다. 마라톤을 사랑하는 작가 무라카미 하루키는, “이 세상에 지루한 것들은 꽤 많지만 단언컨대 올림픽 개막식은 그 중 톱3에 들 것이다. 지루한 데다 무의미하다.”고 했지만, 그래도 “올림픽에는 뭔지 모르지만 써야 할 것이 있는 것 같다” 면서 시드니올림픽을 취재하고 책을 썼다. 다행히 그의 글은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지금부터 20여년 전, 오스트레일리아의 시드니는 올림픽이 열리는 동안 '보공 모스'라는 이름의 나방으로 곤혹을 치룬다. 올림픽 주최자들은 평년 보다 훨씬 기온이 높아져서 나방의 부화가 빨라질 것을 예측하지 못했다고. 이 나방은 피그미포섬이라는 멸종위기에 처한 보호동물의 소중한 먹이가 된다는데, 올림픽 공원에서 야간 경기에 사용하는 조명은 나방들에게 펜데믹 같았을 거다. 누구도 2013년에 도쿄가 개최지로 선정될 때 전염병으로 하계올림픽이 연기될 줄은 생각할 수 없었을테고, 2016년 리우올림픽 폐막식에서 도쿄올림픽 홍보영상을 소개하며 나타난 아베 총리는, 슈퍼마리오 빨간 모자를 벗을 때 몇 년 후 총리직도 벗게 되리라는 것을 상상도 하지 않았으리라. 근대올림픽이 시작되고 124년 동안 인류는 세계 대전을 두 번 겪었고, 1918년에는 스페인 독감으로 5천만 명이 사망했다. 우리는 예측 불가한 세계에서 짧은 계획들을 내세우며 하루하루 살아간다.
올림픽은 어수선하다. 방송으로 정리된 화면을 접하는 이들은 느낄 수 없는, 생생함과 분주함이 경기장 속에 뒤섞여있다. 선수들 몸의 반응과 숨소리, 절실함, 집중력 그리고 공포감들이 멀리서도 전해진다. 일류선수들이 자신의 한계와 맞서 싸운다. 그들은 전성기가 몇 년 밖에 남아있지 않을 것을 스스로 알고 있기에 쇠퇴해가는 몸을 슬퍼하기 전 마지막 불을 태운다. 우리는 그런 육체의 아름다움을 감상하고 사라질 젊음의 절정 속에 벌어지는 향연을 멀리서 즐긴다. 사람들은 선수들이 가장 짧은 거리를 달리는 순간 가장 큰 함성을 외치고, 가장 긴 거리를 달려온 선수를 맞이할 때 가장 큰 박수를 보낸다. 고통의 시간을 쌓으며 4년을 기다린 선수들과 비싼 입장권을 구입하고 구경하는 시간을 기다리는 사람들 사이에서 올림픽 무대는 어떤 종교처럼 존재한다.
성화봉송의 마지막 주자는 올림픽개막식에서 상징적인 교주처럼 등장한다. 시드니 성화대에 불을 올린 선수는 캐시 프리먼. 개최국 오스트레일리아의 여자 육상 400미터 금메달 후보였다. 그녀의 외증조 할머니는 원주민이었는데, 어린 시절 정부에 의해 부모님과 헤어져 시설에 강제 격리되었고 끝내 가족과 만나지 못했다. 1993년에 시드니가 밀레니엄 시대를 여는 2000년 올림픽 개최지로 결정되었을 때, 오스트레일리아는 과거 역사를 청산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호주의’와 결별하고 이민을 받아들였지만, 1960년 후반까지 국세 조사에 원주민을 포함하지 않았고, 나라 안에 원주민이 얼마나 살고 있는지도 정확히 알지 못했다. 그들을 거의 인간 취급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감을 표명하며 ‘화해’를 시도하고 정책을 실행했지만 상처를 치유하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역사의 그림자를 지워보려 애쓰는 나라에게 올림픽은 아주 좋은 투자다. 아무 것도 아닌 불 속에 사람들은 많은 의미를 담아 치켜세운다.
하루키는 1위로 400미터 예선을 통과한 캐시 프리먼에게서 “차가운 불꽃” 같은 것을 느낀다. 결승전이 열리는 날 밤, 관중들도 모두 긴장하고 있었다. 전날에는 여자 마라톤 경기에서 금메달을 목에 건 다카하시 나오코 선수가 일본 열도를 들썩이게 만들었다. 나오코는 은행창구에서 앉아있는 아가씨 같은 미소를 뿌리며 마라톤 결승 테이프를 끊었다. 바로 그 자리에서 캐시 프리먼은 매끄러운 슈트에 싸인 몸에 얼음처럼 냉정하고 굳은 의지를 채우고 400미터 결승선을 바라본다. “총구에서 총알이 발사되는 것처럼, 달려나간 다리는 세차게 대지를 찼다. 사냥감을 덮치는 맹수처럼 결승선을 향해 가슴으로 크게 다이빙했다.” 하루키의 중계는 계속 된다. “힘이 다 한 것처럼, 결승선 옆에 쓰러진 채로 정지했다. … 거기에는 쉽게 접근할 수 없는 무언가가 있었다.” 누군가 트랙에 던진 오스트레일리아 국기와 원주민의 깃발을 들고 그녀는 이윽고 천천히 뛰기 시작했다. “가슴이 뜨거워졌다. 사람의 마음속에 딱딱하게 굳은 무언가가 녹아 내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그걸 가까이에서 목격할 수 있었다. 이번 올림픽 중에서 가장 아름답고 가장 매력적인 순간이었다.” 시상대에서 그녀가 흘린 눈물을 오스트레일리아는 ‘화해’의 증표로 읽었다. 그녀가 지니고 있던 상처는 아름답고 성숙된 달리기와 함께 역사의 고개를 넘었다.
하루키의 시선은 역시 마라톤을 향한다. 이 책은 두 번의 올림픽에서 라이벌 예고로바에게 금메달을 내어준 아리모리 유코의 레이스로 시작되고 끝난다. “경기장의 출발점에 섰을 때는 이미 승부가 정해진 것이나 다름없다. 그것이 마라톤이라는 스포츠다. 어떤 식으로 출발점까지 왔는지, 그것이 전부다. 나머지는 42.195킬로미터를 달리며 실제로 확인할 뿐이다.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그렇게 생각했다. 그녀는 다리와 근육과 피 속에 흐르는 조용한 확신 같은 것을 느꼈다.” 메달을 따야 알아주는 냉엄한 곳. 결과를 내야 비로소 큰 소리로 말할 수 있는 곳. 하고 싶은 말을 하기 위해 달리는, 선수는 고작 메달 한 개로 가치를 평가 받는 올림픽을 그녀는 뛰고 있었다. 그런데 실제로 듣고 있는 것은 내면의 소리였다. 아무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을 칭찬하며 두 다리로 땅을 차고 오르막을 넘고 내리막을 내려간다. 이렇게 달리는 것이 그들의 직업이다.
승리의 소식을 전하는 달리기로 마라톤은 잘못 알려져 있다. 역사가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기원전 490년 페르시아군이 그리스의 아테네에서 북동쪽으로 약 30킬로미터 떨어진 마라톤에 상륙한다는 소식을 듣고 스파르타에 도움을 청하기 위해 전령을 보냈다고 한다. 하지만 보름달이 뜨는 때에는 출전하지 않는다는 스파르타의 금기 때문에 결국 아테네는 도움 없이 페르시아군을 물리쳤다. 어쨌거나 마라톤은 스파르타까지 200킬로미터가 넘는 길을 달려간 전령 페이디피데스를 기리는 뜻에서 올림픽 육상 경기 종목으로 채택되었다. 그리고 마라톤 전투에서 패전한 페르시아의 후손인 이란은 마라톤을 금지했다. 자국의 수도 테헤란에서 열린 1974년 아시안 게임에서는 마라톤이 제외되었다. 2017년 4월 7일, 42킬로미터를 달리는 '제1회 국제 파르시(페르시아)런 대회'가 열렸지만 마라톤이라는 용어는 쓰지 않는다. 1896년 1회 근대 올림픽에서 나란히 뛰고 있는 세 명의 마라톤 선수들의 사진을 보니 시골 버스를 잡으려고 달려가는 동네 청년들 같다. 달리기는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니다.
하루키는 시드니 호텔에서 노트북을 잃어버린다. 스포츠만 잔혹한 것은 아니다. 삶에는 늘 만만하지 않은 일들이 도사리고 있다. 올림픽 열기에 휩싸인 자국 일본에 그는 손으로 쓴 편지를 보낸다. “현대 올림픽을 추진하는 것은 국가주의와 상업주의라는 두 개의 엔진입니다. … 올림픽 대회는 태풍의 눈을 닮았습니다. 그 안에 실제로 포함되면 전체적인 모습이 잘 보이지 않습니다. 어째서 사람들은 올림픽을 지루하다고 생각하지 않으려 할까요? … 올림픽이라는 특수한 시간성 속에서 … 매분 매초를 잃어버리고 있는 자신을 발견합니다. … 의미란 일종의 진통제입니다. … 저는 오히려 관중을 대상으로 약물 검사를 해야 한다고 봅니다. … 그래도 한 가지 인정해야만 할 게 있습니다. 어떤 종류의 순수한 감동은 끝없이 연속하는 지루함 속에서(마비성 속에서) 태어난다는 것입니다.”
올림픽 시작을 열흘 앞두고 이 글을 쓰고 있다. 코로나 팬데믹으로 일 년 연기되어 올해 개최되지만, “2020도쿄하계올림픽”을 명칭으로 그대로 사용해야 하는 이유는 상품들이 이미 그 이름으로 출시되었기 때문이다. 대회이름을 바꿨을 때 따라올 막대한 경제적 손해를 피해야 한다. 상표권 수익을 둘러싼 소송에도 휘말릴 수 있다. 4년 마다 짝수 해에 개최하는 하계올림픽 대회의 전통을 이어가자는 핑계는 팬데믹 때문에 설득력이 없는데도 일본 정부와 IOC는 올림픽을 강행했다. 전 세계가 코로나 바이러스와 전쟁을 벌이고 있지만, 올림픽은 관중의 환호 소리가 없는 경기장에서 선수들 만의 전쟁을 시작할 것이다. 어쩌면 사상 초유의 가장 올림픽다운 경기를 경험하게 될지도 모른다. 너무도 거대하고 권위적이었던 올림픽에서 조금 해방되어, 선수들이 자신과의 싸움에 집중하는 모습을 멀리서 지켜볼 수 있으면 좋겠다. 자본과 미디어 시스템이 만들어낸 올림픽이라는 지루함 속에서 벗어날 수는 없지만, 승자를 사랑하고 패자도 사랑하는 레이스는 언제나 아름다울 것이다. 때로는 이기고 때로는 지지만 계속 살아가고 있는 우리의 삶이 바로 레이스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