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라우마 안에 있던 것
어떤 이야기를 편하게 할 수 있게 되었다는 건, 그것으로 인한 감정적 동요나 고통도 모두 지나가고, 객관적으로 사건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을 때 그것이 가능하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다. 참 힘들고 아픈 시간들이었는데, 그래도 내가 다시 이렇게 '조직 그리고 회사'이야기를 쓸 생각을 했다는 것은 그래도 나도 꽤나 많이 그 시간들에 대해서 괜찮아졌나 보다. 그리고 프리랜서 생활을 하다 보니, 오히려 조직에서 배운 것도 있구나 하면서 그 시간들이 나름 지금의 나에게 값어치 있는 시간이 되어주는구나 생각도 들고 있다니 신기할 따름이다. 그런 측면에서 내가 조직에서 배웠다고 생각되는 것들에 대해 말해보고자 한다.
어버버 하던 신입시절 잘 이해가 가지 않는 업무들도 있었지만, 사수와 팀장님들이 바빠 보이기도 하고, 무언가를 계속 질문하기도 마음에 걸려 '적당히' 업무를 이해한 척하며 진행하기도 했었다. 그러다 보면 꼭 문제가 생겼다. 내가 잘 못 이해한 부분에서 '커뮤니케이션 오류' 등이 발견되어 일을 두 번 하게 된다던가 하는 사건들 말이다. 그러면서 '일의 방향'이 제대로 가고 있는지, 서로 상호 확인을 하는 것 혹은 중간 컨펌을 받는 것이 일의 진행 방향을 잘 잡는데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배웠다. 글로 치자면 서로 '목차'를 공유하는 것이다. 그럼에도 다른 이슈가 터지기도 하지만, 이렇게 '목차' 정도만 서로 확인을 해도 한결 수월하다. 그러다 보니 많은 궁금증과 물음표로 혼자 끙끙 앓다가 피드백까지 한아름 받아 적던 시기들을 지나, 일의 목차들을 적어 "가이드라인 보냅니다. 확인 부탁드립니다."와 같이 일의 담당자와 가벼운 핑-퐁을 할 수 있는 수준까지 이른 나를 보게 되었다.
나로 말할 것 같으면, '게으른 완벽주의자'라고 들어는 보셨나. 바로 완벽하게 하지 못할 바엔 아예 시작조차 하지 않겠다 하며 게으름을 피우는 완벽주의자를 이르는 말. 그것이 나였다. 특히나 '다른 것이 틀린 걸로' 많이 받아들여지는 한국 사회에서는 혹시나 '틀리면 어쩌지'하는 불안감을 가진 이런 '완벽주의병'을 앓고 계신 분들이 많을 수도 있겠다. 문제는 이 완벽주의병이 일에서도 적용이 되었다. '최종', '진짜 최종', '진짜 진짜 최종'처럼 다 끝났다고 생각이 들어도 결국 수정하게 되는 것이 일인데, 이것을 완벽하게 해야 해라는 강박으로 일을 하다 보니 그것을 하기 위한 마음의 부팅부터 일의 진행, 마감까지도 다시 살피느라 잘 넘기지도 못했다. 그렇게 일의 작업 기한이 늘어나는 것이 나만 하는 일이면 괜찮은데, 나의 기획이 넘어가야 디자인이 진행되고(디자인팀 요청) -> 디자인이 나와야 app에 배너를 걸고(개발팀 요청) -> 최종 캠페인 진행 확인을 하게 되는 과정들이 있다 보니, 내가 늘어지면 모든 팀의 일정이 늘어지는 것이다. 처음엔 이런 것이 너무 부담스럽게 느껴지곤 했는데 그런 과정 속에 있다 보니 어느덧 완벽주의도 덜해지고 전체적인 일의 작업 기간 등을 고려하여 '내가 이때까지는 작업을 해야겠구나' 하는 일정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하는 것이다.
만약 처음부터 프리랜서를 했거나 조직에서 일 한 경험이 없으면 누군가와 일 할 때, "급하게 요청드려 죄송합니다."와 같은 문구에 화부터 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너그러이 이해하게 되는 이유는, 조직에서는 아무리 모든 것을 잘 세팅하려 해도 어쩔 수 없는 '상황'이라는 것이 생긴다. 그건 갑작스레 생긴 누군가의 공백일 수도 있고, 추가 요청된 일이 있어서 그럴 수도 있고, 외부 상황이 바뀌어서 생긴 문제일 수도 있고, 매우 다채로운 이유가 존재한다. 때문에 나도 그 다급한 요청을 하는 일이 꼭 필연적으로 생기더라. 그렇기 때문에 그 마음을 알기에, 그런 요청에도 내가 응할 수 있다면 기꺼이 해주게 되는 것이다. 그런 요청에 동료가 괜찮다며 응해줄 때의 천군만마를 얻은 것만 같은 그 마음을 알기 때문이다.
위에서 언급한 다급한 요청사항에 쉽게 응해줄 수 있는 또 다른 요인은, 내가 그때까지 업무를 처리하는 시간이 다급한 일정이긴 하지만, 그 시간 내에 내가 충분히 해당 업무를 해낼 수 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건 바로 능력치인데. 내가 일을 하면서 해당 일이 숙련되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예전 같았으면, 무척 빠듯했겠지만, 그동안 쌓여온 경험과 노하우 같은 것들로 인해 같은 업무를 진행하는 시간이 짧아진 것이다. 이렇기에 다급한 요청에도 너그럽게 괜찮다 하는 여유가 생긴 것이다.
매번 여기저기서 터지는 변수들과 쌓여가는 일에 하루하루가 너무 힘들고, 퇴근하면 기진맥진, 주말에는 아무것도 안 하고 충전하기 바쁜 나날들이 있었다. 더군다나 일은 디폴트요 거기에 요구되는 사회적 눈치와 센스는 나에게 주어진 에너지를 항상 한참 뛰어넘었다. 나의 한계를 항상 느꼈고, 하루하루 버티기가 곤혹이었다. 하지만 그 속에서도 그렇게 훈장처럼 얻어진 것들이 나한테 굳은살 한 두 개쯤은 남긴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