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따를 당하며 고통스럽게 지냈던 중학교 시절을 관통해 고등학교에 올라갈 무렵 사춘기가 왔다. 다리 사이에 털이 나기 시작하면서 키도 자라고 머리도 컸다. 공부와 엄마밖에 모르던 그간의 내가 한심했다. 우리 중학교에서 우리 고등학교로 가는 비율은 30 퍼센트 남짓. 내게 고등학교 진학의 의미는 바로 인간관계의 물갈이였고, 왕따 생활 청산의 기회였다. 더군다나 그 즈음 엄마가 난소암 판정을 받고 투병을 시작하셨기때문에 누구도 나의 변화에 제지를 가할 수 없었다.
공부를 하지 않아서 성적이 곤두박질 치고,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미래나 성적에 대한 고민보다는 욕설이 차지하는 비중이 커질수록 나는 반항기가 생겼다. 그 무렵 하헌재가 나타났던 것은 내게 중대한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녀석과 나는 애초에 서로 좋은 인상을 갖고 있지 않았다. 우리 둘다 너무나 노골적으로 질풍노도의 시기를 맞이하고 있었기 때문에 서로의 센 척이나 어설프게 재는 폼이 마음에 안들었다. 급기야 한 번은 주먹다짐을 할 뻔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내 우리는 누구보다 가까운 친구가 되었다. 록 음악이라는 접점을 찾았기 때문이다. 수업시간에도 우리는 수업은 안듣고 메탈리카와 너바나를 이야기했다. 메탈리카 91년도 모스크바 공연 동영상 죽이지 않느냐, 커트코베인의 죽음은 자살이 아닐지도 모른다더라 와 같은 이야기들.
녀석이 스쿨밴드를 하고 있다는 사실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녀석은 내게 같이 밴드를 하자고 제안했다. 내게는 아버지께서 고등학교 입학 선물로 사 주신 베이스기타가 있다는 걸 녀석에게 자랑했기 때문이다. 고등학교 스쿨밴드가 베이시스트를 뽑는 기준은 베이스기타를 잘 치는 사람이 아니라 베이스기타가 있는 사람이었다. 사실 제안이라기보다 거의 녀석 마음대로 가입시킨 것이지만, 열심히 밴드를 하다 보면 옆 학교인 명일여고나 상일여고 축제 무대에도 불려가지 않겠냐는 제안이 달콤했다.
음악을 전공하지도 않을 고등학교 1, 2학년에게 밴드 활동은 어찌보면 싸움, 술, 담배처럼 금기시 되어있는 영역이었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그것은 나를 지탱해주는 토대가 되었다. 사춘기 남자애들이라면 누구나 가슴에 주체하기 어려운 불길 같은 것을 품고 사는데, 그 불길은 자칫 싸움이나 술, 담배 같은 것으로 표출될 수 있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옳을 수 없는 법이고 술을 마시거나 담배를 피우기에는 우리가 너무 어렸다. 우리의 불길이 그런 것들이 아니라 음악으로 표출될 수 있었던 것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갑자기 엄마 품에서 벗어나 무모하고 위험한 그 어떤 곳이 아니라 난방도 되지 않는 컨테이너박스 가건물이었지만 순수한 열정이 가득했던 연습실에 머물 수 있었던 것, 지금 생각하면 참으로 안도할만한 일이 아닌가.
무대에 서는 자신감은 일상생활로 이어져 왕따로 지냈던 중학교 시절이 무색할 정도로 많은 친구들 사이에서 지내게 되었다. 고등학교 3학년, 어머니의 장례식 때 친구들이 200명이나 찾아온 것, 대학에 들어가 학생회장이 되고, 음악을 하며 멋진 동료들을 만나고, 남들처럼 연애도 하고. 밴드를 하지 않았더라도 나는 지금처럼 살 수 있었을까?
이후에도 하헌재와 나는 함께 밴드를 하려고 여러 번 시도 했지만 쉽지 않았다.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클라우데이’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하헌재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재수생이 되는 바람에 무산되었다. 1년 뒤 ‘루드립스’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하헌재가 대학 진학에 실패하고 삼수생이 되는 바람에 또 무산되었다. 또 1년 뒤 ‘네이키드 에입스’라는 밴드를 만들었지만, 별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녀석이 군대에 가는 바람에 해체되었다. 결국 나는 하헌재 없이 음악을 해 왔고, 현재까지 뮤지션으로 살고 있다.
뮤지션이 되어버린 지금의 내 모습을 원망 한 적도 있다. 동갑내기 사촌누나가 설날에 할머니까 세배를 하며 용돈 봉투를 내밀 때, 누구는 은행원이 되었고 누구는 공무원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그들과 술을 마시고 “에이 네가 무슨 돈이 있다고” 하면서 꺼내는 지갑을 만류하지 못할 때. 그럴 때마다 나는 애꿎은 하헌재에게 볼멘 소리를 하곤 했다. 영화 ‘타짜’에서 도박판에서 막대한 부를 거머쥐지만 언제나 자신을 도박판으로 이끈 전국 최고의 타짜 ‘평경장’을 원망하고 끝내 그를 살해하고 마는 ‘정마담’처럼, 자신이 한 선택을 원망할 용기가 없어 공연히 하헌재에게 불평을 떠넘긴 것이다. 더군다나 이런 나를 뒤로하고 하헌재 이 치사한 놈은, 음악은 취미로 할 것이며 열심히 공부해서 취업을 할 것이라고, 그것이 여의치 않으면 아버지 사업을 물려받겠다고 하지 않는가. 차라리 애초에 녀석과 음악을 시작하지 않고, 어른들에게 그럴싸하게 둘러대기 위해 만들었던 타협된 장래희망이었을지라도 광고 카피라이터나 방송국 피디가 되었다면 지금의 박탈감은 느끼지 않았을지도 모르니까.
그러나 시간을 되돌려 하헌재가 나에게 밴드를 하자고 제안했던 2002년 12월, 모의고사 날 아침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나는 아마 그리 하겠다고 할 것 같다. 어둡게 기억되었을지도 모를 고등학교 시절에 그러하였듯, 여전히 음악은 나의 삶의 토대이고 자신감의 근간이기에, 인생을 다시 살더라도 수많은 가짜 장래희망들을 뒤로 하고 음악을 하게 될 것 같다.
‘하헌재 때문이다’ 라는 노래를 발표하고 하헌재의 어머니께 애정 섞인 야단을 맞았다. “너 왜 자꾸 우리 헌재 들먹이니!” 하지만 이 모든게 하헌재 때문이다. 그건 어쩔 수 없는 사실이다. 하지만 또 이 모든게 하헌재 덕분이기도 하다. 일이 잘 풀리지 않으면 하헌재 때문이고 잘 풀리면 하헌재 덕분인 것이다. 앞으로도 나의 삶 그 자체일 이 지긋지긋한 음악을 내게 소개해 준 천하의 나쁜 자식 하헌재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