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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삶은 계속된다 (좋은생각)

by 강백수



나는 울산광역시 울주군 온양면에 있는 남창이라는 작은 마을에서 태어났다. 아직 결혼식을 올리지 못한 우리 엄마는 친정인 그곳에서 나를 낳고 산후조리를 했고, 아버지는 그동안 작은 신혼방을 마련하셨다.


우리가족은 방학 때마다 외가인 울산에 내려갔다. 남창에는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가 계셨고, 시내에는 외삼촌 내외와 사촌 여동생 은진이, 남동생 재빈이가 살고 있었다. 나는 울산에 내려가는 날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외할아버지와 외할머니는 표현은 투박했지만 따뜻했고, 일식집과 경양식집을 번갈아 경영하셨던 외삼촌 내외는 아버지께는 싱싱한 회가 떡하니 놓여있는 술상을, 우리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맛있었던 돈가스와 생선가스를 대접해주셨다.


항상 따뜻하고 시끌벅적했던 외가. 내가 고등학교 때부터 외가에는 비극의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했다. 우리 엄마가 암으로 돌아가신 것이다. 엄마가 돌아가시던 그 밤, 외삼촌은 말씀하셨다. “민구야, 엄마 돌아가셨다고 외가를 잊어버리고 사는 건 상놈들이나 하는 짓이다. 자주 내려 오니라.” 그 이후로 혼자, 또는 내 동생과 둘이 외가에 내려가면 초등학교 때 돌아가신 외할아버지를 제외하고 다섯 얼굴이 여전히 나를 반겼다.


그러다 몇 해 전, 외숙모마저 암을 앓으시다가 돌아가셨다. 숙모를 잃고 비통해하는 외삼촌과 은진이, 재빈이의 모습은 그보다 바로 몇 해 전이었던 우리 엄마 장례식때 우리 가족의 모습과 똑같았다. 그래도 외가는 아직까지는 따뜻함을 잃지 않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은진이가 결혼 할 남자를 데려 온 것이다. 새로운 가족을 맞이할 준비에 외가는 분주했다.


그러나 비극은 끝나지 않았다. 은진이의 결혼식을 보름도 남겨두지 않은 어느 날, 외할머니께서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깨어날 가망이 없는 뇌사상태.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은진이는 시집을 갔다.


그리고 6개월이 흘러 지난겨울, 끝내 외할머니마저 세상을 뜨셨다. 일주일 후에는 재빈이가 입대를 했다. 외삼촌은 이제 부모님과 아내와 여동생을 잃었고 자식은 시집과 군대를 보내며 혼자가 되셨다. 앞으로는 외가를 향하는 발걸음이 무거워질 것 같았다. 하지만 외가는 이내 또다시 온기를 되찾았다.


바로 지난 주말, 강연 차 울산에 내려갔다가 은진이와 매제의 신혼집에서 하루 신세를 졌다. 내가 첫사랑이었다던 어린 동생이 크지는 않지만 깔끔한 신혼집을 꾸려놓고 사는 걸 보니 비로소 녀석이 시집을 갔다는 사실이 실감이 났다. 그리고 안방에는 작은 요람이 놓여있었고, 너무나 감격스럽게도 거기엔 은진이와 매제의 아들인, 생후 2개월 된 내 조카 래희가 누워있었다. 래희의 작은 손을 잡았던 감각이 잠들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날, 나는 처음으로 래희를 안았다. 가슴으로 전해지는 빠른 심장박동. 내 조카와의 첫 교감에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서울로 올라오기 전 다정하고 든든한 매제와 은진이, 그리고 래희와 식사를 하며 나를 기다리던 다섯 얼굴들을 떠올렸다. 비록 외할머니와 외숙모가 안계셔서 세 얼굴이 되었지만, 매제와 래희가 그 자리를 채우며 다시 얼굴은 다섯이 되었다. 훗날 래희의 동생도 태어나고, 재빈이가 장가를 가고 아이도 낳고 하면 그 얼굴은 더 늘어나겠지.


어느 가정이나 부침이 있다. 정말 심장을 도려내는 것만큼 고통스러운 이별이 있는가 하면 이처럼 가슴 뜨거운 만남도 있다. 그렇기에 우리 가족은, 그리고 우리 인생은 사라지지 않고 언제나 따뜻하게 그 자리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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