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런 밤이 올지는 모르겠지만.
강백수 (가수, 시인)
1990년대 중후반쯤 인기를 끌었던 심야 코미디프로가 있었다. ‘코미디 세상만사’라는 제목의 프로그램이었는데, 엄마는 초등학생이었던 내가 그걸 보고 있으면 늦었으니 얼른 자라고 재촉하곤 했다. 그러면 나는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보겠다고 버텼다. 내가 버틴 까닭은 당시 최고의 인기를 구가하던 서세원, 김미화 씨가 출연했기 때문이었고, 엄마가 내게 재촉한 이유는 그 프로그램이 성인 코미디를 표방했기 때문이었던 것 같다. 어쨌거나 버티며, 버티며 봤던 코너 중에 ‘닮은꼴 부부’였던가 하는 코너가 하나 있었다. 거기서 서세원, 김미화 씨는 신혼여행중인 부부로 등장했다. 오랫동안 애타게 기다려 온 신혼 첫날 밤, 둘은 우스꽝스러울만큼 과장된 설렘으로 수차례 ‘거사’를 시도하지만, 번번이 나타나는 불청객들의 방해로 끝내 날이 샐 때까지 ‘뜻’을 이루지 못하고 만다는 구성의 콩트였다. 콩트는 두 부부의 울음섞인 ‘첫날밤에~ 첫날밤에~’ 하는 식의 노래로 마무리 된다.
‘신혼 첫날밤’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오랫동안 그들의 모습이었다. 그 ‘거사’가 어쩌면 각자의 첫 섹스일지도 모르는 두 사람의 첫 섹스였으리라는 것은 몇 년 쯤 지나고서야 알게 되었다. 그제서야 나는 그들이 어째서 그토록 절박한 모습으로 한 이불을 덮으려 했는지, 그리고 날이 새고 말았을 때 어째서 그토록 애처롭게 노래를 불렀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많은 남녀가 신혼여행지에서 맞는 첫날밤에 첫 섹스를 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아닐거라고 생각하지만) 어쨌거나 1990년대의 공중파 미디어는 그것을 보편적인 모습으로 규정했다.
‘첫날밤=첫 섹스’ 라는 등식은 2017년의 삼십대 싱글남인 나의 눈에는 다소 비현실적으로 보인다. 몇 년도, 어느 곳에서 맞이할 밤일지는 모르지만 그 밤이 나의 ‘첫’일 가능성은 이미 사라졌다. 연애를 구성하는 중요한 요소들 중에 섹스가 반드시 포함되어 있으리라 믿기에 그 밤이 우리의 ‘첫’일리도 없다. 평생을 함께할 누군가를 결정하기 위해서는 고려할 수 있는 모든 것을 고려해야 할 것이고, 이미 결혼식을 치루고 신혼여행지에 도착한 우리라면 서로의 은밀한 부분에 대해서도 충분히 경험하고 고려한 상태일 것이다. 그렇기에 나의 허니문에 대한 로망에서 그 ‘첫’이라는 부분은 그다지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머나먼 미래로 남아있으리라 믿었던 결혼이라는 단어가 이제는 내 주변을 엄습하는 단어가 되었다. 철딱서니 없던 친구들이 어느덧 ‘유부’들이 되어 쉴새없이 자신들의 결혼생활 이야기를 늘어놓곤 한다. 그럴 때면 판타지소설이나 SF영화처럼 저 차원의 문 너머에 존재하던 결혼이라는 단어와 나의 거리가 조금씩 좁혀져오는 기분이 든다. 저 멀리있던 녀석이 조금씩 실루엣을 드러내며 다가올수록 내가 느끼게 되는 감정은 설렘보다는 두려움에 가깝다. 어쨌거나 내 지난 삼십여년의 삶과는 전혀 다른, 새로운 삶의 문을 열어젖히는 일이 아닌가. 어떤 친구들은 그 문 너머에 천국이 있다 하고 어떤 친구들은 지옥이 있다 한다. 어느 쪽의 말을 들어도 그럴싸해 보인다. 물론 결혼을 결정하는 마음은 그것이 반드시 천국이리라는 믿음이겠지만, 그 어떤 확신이 있다 하더라도 낯선 곳으로의 여행은 설렘만큼의 두려움을 동반하는 법. 새로운 인생을 맞이하는 첫 발걸음에 두려움이 없을 리 없다.
게다가 그 문을 열기도 전에 우리는 결혼 준비 및 결혼식이라는 치열한 전투를 치러야 한다. 웨딩사진과 결혼식 때문에 굳이 다이어트를 하지 않아도 저절로 말라가는 주변의 남녀들을 보며 저것은 실로 전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분명 결혼 준비 과정은 게임으로 치면 튜토리얼일진데 이건 무슨 난이도가 ‘다크소울(첫 몬스터부터 보스급의 난이도를 자랑한다는 비디오게임)’급인지, 시작부터 뭐 그리 험난한가 싶다. 신혼여행은 본 게임에 들어가기에 앞서 잠시 주어지는 보너스 스테이지 같은 건가.
결혼한 당일 밤은 신혼여행을 떠나기에 앞서 공항 근처의 어느 호텔에서 뭘 할 새도 없이 뻗어 자는 경우가 많다고 들었다. 어차피 사실 그 날이 둘이 보낼 첫 날도 아닐테고, 굳이 우리의 첫날 밤을 규정한다면 홀가분하게 여행을 떠나 맞이하는 그 첫날 밤으로 규정하겠다. 그렇다면 그날 밤 내 옆에 있을 바로 그녀는 누구인가. 주변의 모두가 축하를 던지는 가운데 유일하게 나의 불안을 함께 느껴줄 사람이며, 미지의 세계로 향하는 두려움을 함께 견뎌낼 단 한 명의 동반자. 결혼 준비라는 빡센 첫 관문을 함께 헤쳐낸 세상 하나뿐인 나의 전우일 것이다. 그 때가 언제일지는 모르지만 그 무렵쯤에는 내가 나보다 내 옆에 있는 그 고마운 사람을 먼저 챙길 줄 아는 성숙한 인간이 되어있기를 소망한다. 똑같은 두려움일지라도 내 것보다는 그녀의 것을 먼저 챙길 줄 아는 인간. 똑같이 고되었더라도 내 다리보다는 그녀의 다리를 먼저 주물러 줄 수 있는 인간. 허니문(Honey Moon). 우리에게 비로소 주어진 꿀 같은 달밤을 나보다는 그녀를 위한 밤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이타적인 인간.
여행지의 숙소에서 보내는 첫날 밤. 뜨거운 물로 목욕을 하고 나란히 앉아 서로가 좋아하는 술을 한 병씩 두고 마시고 싶다. 술기운을 빌어 그녀의 솔직한 이야기를 많이 들을 수 있는 밤이었으면 좋겠다. 앞으로 다가올 새로운 삶에 대해 무엇이 기대되고 무엇이 걱정되는지. 여기까지 오는 동안 무엇이 든든함을 느끼게 만들었고 무엇이 서운함을 느끼게 만들었는지. 그리고 무책임한 약속을 내던지기보다는, 그녀와 똑같은 감정으로 이 밤을 맞이한 사람이 눈앞에 있다는 사실을 끊임없이 확인시켜주고 싶다. 어쨌거나 당신에게는 내가 있다고. 앞으로 언제나 그럴 것이라고.
많은 말들이 오가겠지만 말이라는 것은 태생적으로 불완전한 의사표현방식. 그래서 인류는 음악과 미술과 같은 예술을 만들었고, 연인들은 몸을 맞댄다. ‘내가 있다’는 사실을 오로지 말로만 표현하는 것은 불완전하다. 그날만큼은 우리가 관통해온 연애기간동안 터득해온 모든 것들을 동원해서, 유달리 이타적인 방식으로 완전한 대화를 나눌 거다. 온 몸과 온 맘으로.
나의 신혼 첫날밤을 그녀를 위해 바치는 것을 유난스럽다 할 수도 있겠지만, 굳이 고집하고 싶은 내 로망이랄 것이 별로 없는 까닭이다. 아마도 내 주변의 삼십대 초반 남자들이 거의 같은 생각일 거다. 그래도 굳이 내 로망을 굳이 몇 가지만 끼워 넣자면, 그 날의 배경음악이 아소토유니온의 Think About’ chu 였으면 좋겠다는 것 (최근 리메이크 되어서 나온 버전 말고 원곡, 지금도 그 음악을 반복해서 들으며 이 글을 쓰고 있다). 내가 마실 술은 비싸서 잘 못 사먹는 싱글몰트 위스키 ‘라가불린LAGAVULIN’이었으면 좋겠다는 것. 그리고 이건 좀 부끄럽지만, 그날만큼은 잔뜩 칭찬을 받고 싶다는 것. 그런 밤이 올지는 모르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