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anonymous
Apr 12. 2024
1. 뭔가 잘못되어가고 있다.
-신호는 여러 번 있었다. 내가 그냥 넘겼을 뿐.
A.
둘째 돌사진을 찍는 날이었다.
첫째 때 성장앨범을 하지 않은 것이 후회되어 둘째는 만삭-100일-돌로 이어지는 성장앨범을 계약했었다. 그때 어머님이 우리 집에 상주하던 시절이었는지 그냥 ‘자주’ 보던 시기인지는 확실치 않은데, 돌사진을 찍는 김에 ‘가족’ 사진을 찍기로 했다. 여기서 가족사진이라 함은 어머님, 아버님, 시누, 시누남편(이땐 둘이 신혼이라 아이가 없었다), 남편과 나 그리고 우리 아이들 둘을 의미했다.
나의 원래 계획은 둘째 독사진을 찍고, 우리 네 가족사진을 찍고, 우리 아이 둘의 남매 사진을 찍어주고, 전체 가족사진을 찍는 것이었다. 뭐 좀 추가해서 부모님 사진을 찍어드릴 수 있겠지 정도 생각했다.
그런데 나중에 보니 찍은 건 둘째 독사진, 전체 가족사진, 우리 넷 가족사진, 시부모님 둘만 찍은 사진, 시누네 부부 둘이 찍은 사진이다. 여기까지 찍으니 세 살 첫째와 한 살 둘째가 진이 빠져 더 이상 촬영을 진행할 수 없었다. 스튜디오에서 남매사진을 같이 찍어주고 싶은 내 바람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그땐 그냥 넘겼는데, 지금 생각하면 이상하다. 이건 우리 가족사진 촬영인가 시댁 가족사진 촬영인가? 남매사진도 그렇고 생각해 보니 우리 부부만은 안(못) 찍었다. 아, 물론 돈은 우리 부부가 다 냈다. 액자도 선물로 해드렸지.
B.
조금 더 거슬러 올라가서 첫째를 낳고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이다.
나는 제왕절개를 했다. 첫째는 역아이고, 두상이, 특히 뒤통수가 동그랗게 생겨서 내 갈비뼈 사이에 낀 채로 한 번도 돌지 않았다. 엉덩이부터 뺐어야 해서 나는 피가 많이 났다. 빈혈수치가 한 자릿수로 곤두박질쳤다. 잠도 잘 자지 못했다. 컨디션이 안 좋았다.
시어머니가 시누와 함께 나를 문병 온 건 애 낳은 지 이틀째인가 삼일째 되는 날이었다. 첫 손주라 많이 궁금하셨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일인실에 있었는데 보호자는 한 명 밖에 들어오지 못했다. 어머님은 남편을 내보내고 시누와 함께 몇 시간을 계시다 가셨다. 남편은 집으로 쉬라고 보내고 반나절쯤 계시다 저녁에 남편이 오자 돌아가셨던 것 같다. 친정부모님은 그 후에 오셨다가 다 죽어가는 내가 안쓰러우셨던지 일찍 자리를 뜨셨다.
조리원 2주가 끝나고 집에서 돌아왔을 때 나는 산후도우미를 신청했다. 친정엄마는 돈을 줄 테니 한 달 보다 더 넉넉히 계속 이모님을 쓰라며 걱정하셨다. 도우미 이모님을 둔지 2주가 지나갈 무렵, 아이를 보러 올라오신 어머님이 ‘너희가 원하면’ 본인이 산후조리를 해주고 싶다고 남편을 통해 말씀하셨다. 나는 싫어서 대답을 피했다. 어느 날 둘이 있게 되었을 때 어머님은 말씀하셨다.
“네가 불편해도 좀 참아라”
그렇게 나는 내가 불편해도 참고 시어머님의 산후조리를 받게 되었다. 나는 그때 알았다. 이분은 본인이 하고 싶은 것을 ‘네가 원해서’하고 하게 하는구나.
어머님은 아직 젊었고(50대셨음), 의욕에 넘치셨다. 나에게 산후조리원에서 어떻게 지냈는지 스케줄을 물으시고는 삼시세끼 밥과 두 번의 간식을 챙겨주셨다. 밤에는 주로 내가 보고, 어머님이 아침에 일어나시면 아기를 넘기고 나는 오전에 잠을 잤다. 첫째 모유수유를 7개월쯤 했었는데. 모유수유를 하는 모습을 보실 때도 있었다. 매우 민망하고 싫었지만, 나는 그냥 내려놨다. 안 그럼 내가 살 수가 없으니까. 나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너무나 취약한 시기였다.
이 시기에 사진들은 보면 모든 행사에 시부모님이 있다.
유아세례(태어나자마자 알아봄), 50일 사진, 100일 사진 등 집에서 한 가족행사의 모든 사진에.
챙겨주셔서 고맙다고 생각을 했다. 요즘 시부모님들은 애 봐줄 생각을 안 하셔서 힘들다고 하는데 이렇게 육아를 적극적으로 도와주시니 좋구나. 좋은 쪽으로 생각을 했었다.
C.
아 내 순종의 역사(!)는 좀 더 거슬러 올라가면 결혼식을 예로 들 수 있다.
시댁은 아주 독실한 천주교인데, 시부모님은 성당에서 만나 결혼을 하셨다. 두 분의 형제자매가 각 3명 이상이고, 어머님의 어머님과 아버님의 부모님도 천주교 신자였다. 남편은 중고등학교 때 신부를 꿈꿨다고 했다. 그러나 연애할 때는 한 번도 성당에 가지 않았다. 우리는 직장 연수원에서 만났는데, 연수원에서 하는 성당모임은 그냥 술모임이었다. 남편은 술과 술자리 그리고 사람들과 어울리는 것을 좋아했다. 신자들이 흔히 하는 식사 전 기도나 성호 긋기도 하지 않았다. 만약 그런 걸 하는 사람이었으면 거리를 두었을 것이다. 나와는 다른 세계의 사람이니까.
그런데 결혼하겠다고 처음 어머님을 만났을 때, 어머님의 첫마디는 ‘교육을 받아보지 않겠니?’였다. 이미 우리 집 근처 성당이 어디고, 교육이 언제 어떻게 있는지 알아보고 남편에게 주입시킨 뒤였다. 성당에서 결혼을 하려면 세례를 받아야 했다. 세례뿐만이 아니라 각종 교육도 받아야 했는데, 딱히 결혼식에 대한 로망이 없던 나는 그냥 했다. 당시 예비신랑이었던 남편은 매주 일요일 아침 9시에 우리 집으로 나를 데리러 와서 같이 교육을 듣고 끝나면 함께 미사를 했다.
우리 집은 사실 불교인데 할머니가 절에 열심히 다니셨지만 당시에는 건강이 나빠져 더 이상 나가지 못하는 상황이었고 엄마, 아빠는 딱히 어떤 종교를 열심히 믿거나 종교생활을 하지는 않으셨다. 다만 할머니 다니시던 절에 필요한 의무를 하는 정도였다. 우리에게 강요하지도 않으셨다. 나는 어렸을 때는 교회 권사였던 외할머니 손에 이끌려 교회에 다녔지만, 오래가지 못했다. 나는 그다지 종교적인 인간은 아니어서 무교라고 했는데, 무교도 종교의 일종이라는 걸 애 낳고 깨닫고 있다.
무튼 매주 교육을 가니 주기도문 등 이워햘 할 것이 쌓일 무렵, 나는 마음에 괴로움이 일었다. 내가 진심으로 믿지 않는 것을 소리 내서 외는 것은 고역이었다. 남편에게 이러한 괴로움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만약 버럭 화를 낸다거나, 당연한 듯해달라고 했다면 결혼을 재고했을 수도 있겠다. 그러나 그는 매우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자기가 하기 싫다면 안 해도 된다’고 했다. 나는 그 모습이 짠해서 ‘아냐 일단 더 해볼게’라고 했다.
이 정도로 돌아있어야 결혼이 되는구나.
뒤돌아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