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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익명의 변호사 Oct 04. 2016

한 병원 이야기

가족의 연명치료 중단 요구를 받아들인 의사

1. 사건 개요


19년 전의 일이었다. A는 1997.12.4 14:30경 술에 취한 채 화장실을 가다 중심을 잃어 기둥에 머리를 부딪치고 시멘트 바닥에 넘어지면서 다시 머리를 바닥에 찧어 경막 외 출혈상을 입고 서울 동작구 신대방동 소재의 병원 중환자실로 보호자 없이 후송되었다(공교롭게도 이 병원은 당시 최근 이슈가 된 서울대학교 병원이 위탁받아 운영 중인 곳이었다). 당직 의사들은 같은 날 18:05경 A에 대한 경막외 혈종 제거 수술을 실시해 다음날 02:30경 혈종을 완전히 제거하고 수술을 마쳤다. A는 1997.12.5. 04:00경 중환자실로 옮겨져 대광 반사가 돌아오는 등 의식이 회복되고 있었으나(글래스고 혼수 척도 E3->M5) 뇌수술에 따른 뇌부종으로 스스로 호흡을 할 수 없는 상태에 있었으므로 호흡보조장치를 부착한 채 계속 치료를 받고 있었다.


문제는 이 다음에 일어났다. 병원에 도착한 A의 보호자(아내)는 주치의에게 더 이상의 치료비를 추가 부담할 능력이 없다는 이유로 퇴원을 요구하였다. 주치의는 "A의 상태에 비추어 인공호흡장치가 없는 집으로 퇴원하게 되면 호흡을 제대로 하지 못하여 사망하게 될 것"이라고 설명하고 퇴원 요구를 거부하였지만, 아내가 A의 퇴원을 계속하여 강권하자 상사에게 직접 퇴원 승낙을 받도록 하라고 하였다. 위 상사인 의사는 1997. 12. 6. 10:00경 주치의로부터 위와 같은 아내의 요구사항을 보고 받은 후, 자신을 찾아온 A의 아내에게 '환자가 퇴원하면 사망한다'라고 설명하면서 퇴원을 만류하였으나(의사들은 "치료비가 없다면 차라리 환자 상태가 안정될 때까지 1주일 정도 기다렸다가 도망가라"라고 하였다) 그녀가 계속 퇴원을 요구하자 이를 받아들여, 주치의에게 A의 퇴원을 지시하였다. A의 아내가 퇴원수속을 마치자 주치의는 수련의에게 A를 집까지 호송하도록 지시하였고, 같은 날 14:20경 수련의와 A의 아내는 A를 중환자실에서 구급차로 옮겨 싣고 A의 집까지 데리고 간 다음 수동 작동 중이던 인공호흡보조장치와 기관에 삽입된 관을 제거하였다. A는 5분 후 목 부위에서 꺽꺽거리는 소리를 내며 불완전하게 숨을 쉬다 호흡곤란으로 사망하였다.


2. 이후 법원의 판단


당시 재판부와 검찰은 A가 회복 중이었고, 퇴원하지 않았으면 살 수 있었다는 부분에 주목했다.


1심은 A의 부인, 담당의사, 담당의사를 보조한 3년차 수련의, 1년차 수련의를 살인죄의 부작위범으로 처벌하였다. 2심에서는 수련의를 제외한 의료진을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의 방조범으로 처벌하였다. A의 아내는 명확한 정범이라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의사들이 문제가 됐다. 법원은 이에 대해 살인죄에 있어서의 고의는 반드시 살해의 목적이나 계획적인 살해의 의도가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고 자기의 행위로 인하여 타인의 사망의 결과를 발생시킬 만한 가능 또는 위험이 있음을 인식하거나 예견하면 족한 것이고 그 인식 또는 예견은 확정적인 것은 물론 불확정적인 것이더라도 소위 미필적 고의로서 살인의 범의가 인정된다고 설시하였다. 나아가 범죄가 적극적 작위에 의해서도 이루어질 수 있음은 물론, 결과의 발생을 방지하지 아니하는 소극적 부작위에 의하여도 실현될 수 있는 경우에, 행위자가 자신의 신체적 활동이나 물리, 화학적 작용을 통하여 적극적으로 타인의 법익 상황을 악화시킴으로써(호흡기 제거 지시) 결국 그 타인의 법익을 침해하기에 이르렀다면 이는 작위에 의한 범죄로 봄이 원칙이고, 작위에 의하여 악화된 법익 상황을 다시 되돌이키지 아니한 점에 주목하여 이를 부작위로 볼 것은 아니다(대판 2004.6.24 2002도995)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의사들이 소극적으로 치료행위를 중단한 점보다 퇴원 요청을 받아들여 적극적으로 퇴원 외 필요한 조치를 취한 점을 인정해 처벌한 것이다.


다만 법원은 정상(A는 망나니였다)을 참작하여 의료진은 물론 살인죄의 주범인 A의 부인에게도 집행유예를 선고했다. 살인죄의 방조범으로 처벌받은 의료진은 상고하였으나 대법원은 상고를 기각했다. A의 아내와 의료진은 퇴원 후 환자의 사망에 대해 법적인 이의를 제기하지 않겠다는 귀가 서약서에 서명했지만 별 효용은 없었다.


3. 단상


경찰 물대포를 맞아 쓰러진 농민 백모씨가 서울대병원에서 사망했다. 병원이 백씨의 사인에 대해 외부 원인으로 인한 사망을 뜻하는 '외인사'가 아니라 '병사'로 기록 논란이 됐다. 주치의의 판단이었다. 해당 의사는 "백 씨의 경우 가족들이 고인의 뜻에 따라 적극적인 치료를 거부했기 때문에 예외적으로 ‘심폐정지’라고 기재해야 한다고 판단했다"며 “만약 환자가 적절한 최선의 치료를 받은 후 사망했다면 사망의 종류를 ‘외인사’로 기재했을 것”이라고 했다. 백 씨를 사망에 이르게 한 직접적인 원인은 외부 충격이 아니라, 급성신부전증 등 합병증을 제대로 치료하지 않아 상태가 악화됐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서울대병원에 따르면 백 씨의 보호자들은 혈액투석, 인공호흡 등을 명시적으로 거부했고 9월 초에는 약물치료도 받지 않겠다고 했다. 의료진은 위급할 때에는 보호자의 동의를 얻어 최소한의 항생제 투여와 수혈을 하는 데 그쳤다. 그러나 백 씨의 유족과 ‘백남기 투쟁본부’ 측은 “의료진이 소생 가능성이 없다고 했기 때문에 고통을 주는 진료를 거부한 것일 뿐”이라고 반박했다(동아일보, 2016.10.4).


1997년 사건은 변호사라면 모를 수 없는, 아니 형법을 배운 이라면 누구나 아는 보라매병원 사건 판례다. 이 사건 이래 보호자 요구로 치료를 중단했더라도 환자가 사망한 경우 의사가 처벌될 여지가 생겼다. 의료 부문에는 문외한이라 조심스럽지만 기사대로라면 해당 병원은 퇴원만 시키지 않았을 뿐이지 '최선의 치료'를 하지 않았다는 점을 자인하고 있다. 더 재미있는 점은 의사가 그 치료를 다하지 못한 이유를 환자 보호자의 반대 때문이었다고 주장하는 부분이다. 판례와 이 사안의 사실관계는 동일하지 않다. 하지만, 쟁점은 분명 비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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