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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Feb 25. 2018

경계 위를 달리는 자들 - <블레이드 러너>

영화 <블레이드 러너 : 파이널 컷> 리뷰



 ‘블레이드 러너(Blade Runner)’, 직역하면 ‘칼날 위를 달리는 사람’이다. 육안으로는 구별할 수 없는 인간과 안드로이드 리플리컨트를 구별하는 경계(칼날) 위에 서 있는 그들에게 어울리는 이름이다. 블레이드 러너는 인간과 리플리컨트의 경계, 그 칼날 위를 달리는 자란 것이다. 그 구별하기 힘든 모호한 경계 위에 이 영화는 위태롭게 서 있다.

 필름 누아르, 사이버 펑크


 <블레이드 러너>는 SF영화이지만 장르 상 필름 누아르에 가깝다. 7~80년대는 발전한 기술력으로 다양한 시도를 하던 시대였다. 그 대표적인 예가 SF에 서부극과 사무라이 영화를 접목시킨 <스타워즈> 시리즈다. 그리고 <블레이드 러너>는 탐정 누아르를 SF에 끌어들여 디스토피아를 창조해냈다.

 2019년의 LA, 이제는 1년 밖에 차이나지 않는 시대적 배경이다. 영화에서 2019년의 LA는 밤과 낮의 구분이 없을 정도로 어둡고 비가 끝없이 추적추적 내리고 안개가 가득하다. 네온사인이 비치는 거리를 은퇴한 블레이드 러너(형사)가 걸어간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이라며 어쩔 수 없이 사건을 맡고 영화는 염세적인 분위기로 흘러간다. 시대적 배경과 기술이 미래라는 것을 빼면 전형적인 누아르의 형식이다. 게다가 지금은 없지만 초기 버전은 40년대 탐정 누아르처럼 주인공 ‘데커드’의 나레이션이 들어가 있었다(하지만 해리슨 포드의 나레이션은 대충 녹음한 게 티가 날 정도로 형편없다).

 LA라고 하지만 일본의 거리와 혼동될 정도로 일본의 문화가 곳곳에 가득하다. 무려 코카콜라보다 더 큰 대형화면으로 게이샤 여성이 나오는 광고가 상영되고 길거리에선 영어보다 일본어를 더 자주 볼 수 있다. 작품이 제작될 당시 무섭게 발전하던 일본에 대한 경계와 두려움이 담겨있는 것이다. 이러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과 분위기는 사이버펑크 장르의 효시가 되었고 훗날 수많은 SF영화들에 의해 모방되었다.


 눈


(영화의 스포일러가 들어가 있습니다.)

 오프닝에서 영화는 미래 LA의 모습과 그것을 바라보는 클로즈업된 눈을 보여준다. 본다는 것, 눈은 영화에서 중요한 요소이다. 인간과 리플리컨트를 구별하는 방법은 눈을 관찰하는 보이트-캄프 테스트이다. 그들은 육안으로는 구별이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본다는 것은 기억과도 관련이 있다. 기억은 리플리컨트를 인간과 구별 짓는 것이다. 시각적 상징은 기억의 주가 된다. 리플리컨트들이 주입된 기억에 의한 가짜 사진임에도 사진을 소중히 여기는 것은 이런 이유다. 리플리컨트의 리더 ‘로이’는 최후를 맞기 전 ‘데커드’에게 자신이 본 광경들, 그에 관한 기억을 이야기한다. 또한 ‘로이’가 타이렐 회사의 회장이자 자신의 창조주인 ‘타이렐’을 죽일 때, 그의 눈을 손가락으로 눌러서 죽인다.


 리플리컨트 vs 인간, 진짜 vs 가짜


 창조주에 대한 고민과 반항은 리들리 스콧 감독이 오랫동안 매달려온 주제이다. 그는 최근 <프로메테우스>와 <에이리언 : 커버넌트>를 통해서 창조주를 찾아 헤매는 인간과 그 인간이 창조해 낸 안드로이드의 반란에 대해 다루었다.

 영화 내에서 리플리컨트는 인간으로 대우받지 않는다. 그들을 죽이는 것도 사형이라 부르지 않고 ‘은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개봉버전에서는 은퇴로 번역되지만 물건의 의미를 담은 폐기나 퇴역이 의미가 더 가깝다). 그들을 인간, 혹은 생물로도 취급하지 않고 물건 취급한다는 것이다. 과거 노예제가 있던 미국에서는 흑인노예를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홀로코스트 당시의 나치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죽은 유대인들에게 시체라는 단어를 쓰는 것을 금지하고 인형이나 누더기라고 불렀다. 이것은 죄책감을 덜기 위함이기도 하지만 대상의 인격을 말살해버리는 것이기도 하다.

 영화에서 ‘브라이언’ 반장은 리플리컨트를 ‘skinjob’(번역으로는 ‘껍데기’)라고 부른다. 초기 상영버전의 나레이션에서 ‘데커드’는 ‘브라이언’이 과거였다면 흑인을 ‘nigger’(깜둥이)라고 불렀을 사람이라고 설명한다. 겉으로 보기에는 인간과 전혀 차이가 없지만 인간들은 그들을 차별하고 죽이려 드는 것이다.

 초반까지만 봤을 때 영화는 인간이 선이고 리플리컨트가 악이 되는 선과 악의 대립으로 흘러갈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곧 예상 밖의 전개가 이어진다. ‘레이첼’은 자신이 리플리컨트 임을 안 뒤 눈물을 흘린다. 첫 번째로 ‘은퇴’ 당하는 리플리컨트 ‘조라’는 부서지는 나비의 날개처럼 아름답고 처연하다. 리플리컨트는 결국 절대악이 아니라, 죽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서툰 생명들로 묘사된다. 의례 액션 영화에서 자주 볼 수 있는 통쾌함이나 만족을 데커드의 작업에서 느낄 수는 없다. 슬픔과 혼란 속에서 데커드는 총을 든다. 결국 그가 직접 죽이는 리플리컨트는 4명이 아니라 2명 뿐이다. (재밌는 것은 초반 노점상에서 데커드가 음식을 4개 달라고 하지만 주인이 손가락 두 개를 펴며 일본어로 말하는 장면이 있는데 그 뜻이 ‘두 개로 충분해요’다).

 사실상 인간과 리플리컨트, 그 둘의 차이는 감정과 수명 뿐이다. 하지만 리플리컨트 또한 시간이 지나면서 감정을 느낄 수 있게 되고 새로운 모델은 주입된 기억을 통해 처음부터 감정을 느낄 수 있다. 감정을 갖게 된 그들은 동료의 죽음에 슬퍼하고 분노하며, 곧 다가올 소멸을 두려워하며 저항한다. ‘인간다움’의 본질이 짧은 시간동안 농축된 것이다. 수명 또한 마찬가지다. 급속 노화증에 걸린 ‘세바스찬’은 고작 25살인데도 노인의 얼굴을 하고 있다. 4년의 수명만 가진 리플리컨트와 별반 다를 것 없는 존재인 것이다.

 영화 속에서 오히려 가장 인간다운 것 또한 리플리컨트들이다. 더 오래, 그리고 사람답게 살고 싶은 그들의 욕망은 가장 기초적이면서 근원적인 욕망이라 할 수 있다. 그에 비해 주인공 ‘데커드’를 비롯한 다른 ‘인간’들은 별다른 목적없이 흘러가는 대로 사는 것처럼 보인다. 인간성의 상실인 것이다. 리플리컨트가 오히려 인간보다도 더 인간다운 삶을 살고 있는 것이다(아이러니하게도 이것은 ‘타이렐’ 회사의 모토인 ‘인간보다 더 인간답게’에 부응한다.)

"공포 속에서 사는 게 어때? 그게 바로 노예의 삶이거든.“


 리플리컨트를 만드는 ‘타이렐’과 ‘세바스찬’은 극중에서 체스 게임을 벌인다. 체스 게임은 그들이 체스 말들을 조종하는 존재라는 것을 암시하는 것일까? 하지만 체스 말들을 움직이던 그들은 그들이 만든 체스 말, 리플리컨트에 의해 목숨을 잃고 만다. 처음에 의미의 정반대로 그들 역시 체스의 말에 불가하다는 것일 수도 있다.

 자신의 수명을 더 늘릴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로이 배티’는 결국 죽음을 받아들인다. 이 과정에서 그는 스스로 자신의 손을 못으로 뚫고, 자신의 동료들을 죽이고 자신마저 죽이려는 원수 ‘데커드’의 목숨을 오히려 구해준다. 그가 죽기전에 내뱉는 시적인 말들은 죽음을 초월한 자세라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창조자를 죽인 ‘돌아온 탕아’가 모든 것을 초월하고 손에 못이 박인 채 원수에게 손을 내민다. 가장 성스럽고 인간다움을 보여주는 이 또한 리플리컨트다.

 ‘데커드’는 리플리컨트인가?


 이 영화가 나온 지 30년이 훌쩍 지났지만 여전히 논란으로 남아있는 것은 ‘데커드는 과연 리플리컨트인가’이다. 초기 상영본에서는 ‘데커드’의 나레이션으로 진행되어 그런 생각을 할 여지 자체가 없었지만 감독의 의도대로 재탄생한 디렉터스 컷과 후에 마무리된 파이널 컷은 나레이션을 삭제하고 결말을 지금의 형식으로 바꾸면서 논쟁의 여지를 많이 남겼다.

 ‘데커드’는 ‘은퇴한(retired)’ 블레이드 러너이다. 그러다 쓸모가 생겨서 다시 돌아와 리플리컨트들을 ‘은퇴(retirement)’ 시키는 일을 맡게 된다. 뭔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극 중 동료 블레이드 러너 ‘개프’는 주변 사물을 접어 형상을 만드는데 이것은 모두 ‘데커드’의 심리를 대변한다. 처음 ‘브라이언’ 형사의 제안을 거절하고 나가려다 포기할 때, ‘개프’는 겁쟁이를 상징하는 닭을 접는다. 그리고 리플리컨트 ‘레온’의 방을 찾아갔을 때 ‘개프’는 발기한 남자의 형상을 만든다. ‘데커드’가 흥분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데커드’가 ‘레이첼’을 데리고 떠나려할 때 발견한 종이는 유니콘의 형상이다. 이것은 ‘데커드’가 가지고 있는 희망을 대변한다.

 하지만 여기서 유니콘에서 의문이 생긴다. 중반부에 ‘데커드’는 술에 취한 채 유니콘이 달리는 환상을 본다. 이것은 ‘데커드’만 알고 있는 기억인데 ‘개프’는 유니콘의 형상을 접어서 ‘데커드’가 보게 한다. 이것은 유니콘에 관한 ‘데커드’의 기억이 이식된 것이고 ‘개프’가 이를 알고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또한 의문은 다른 사소한 것들에서도 나타나는데 ‘레이첼’이 ‘데커드’에게 본인에게 보이트-캄프 테스트를 해본 적이 있냐고 물었을 때 ‘데커드’는 자는 척을 하며 대답을 피한다. 리플리컨트들은 기억, 특히 사진을 중요시하고 데커드의 방 안에는 수많은 사진들이 붙어있다. 또한 리플리컨트들의 눈이 붉은 빛을 내는 장면이 나오는데 ‘데커드’ 또한 그런 장면이 있다(감독은 이것을 실수라고 말하긴 했다). 최후의 결투에서 ‘로이’와 ‘데커드’ 모두 손을 다치는 것은 둘의 동질성을 보여줌과 동시에 ‘데커드’ 또한 리플리컨트임을 암시하는 장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데커드’가 리플리컨트인지 아닌지는 영화에 재미를 주는 요소 중 하나이지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바와는 동떨어져 있다. 중요한 것은 ‘데커드’가 서있는 그 경계, 칼날(blade)다. 그 경계란 무엇인가? 이 영화는 그런 질문을 관객에게 내던지며 끝을 낸다.


“그 여자가 죽게 돼서 안 됐네. 하긴 누군 영원히 사나?”

 영화의 마지막에 ‘데커드’는 결국 또 하나의 리플리컨트이자 그가 사랑하는 ‘레이첼’을 데리고 떠난다. ‘레이첼’을 통해 또 다른 희망 하나를 간직하는 것이다. 초기 상영본의 결말에서는 ‘데커드’의 나레이션을 통해 ‘레이첼’이 수명이 정해지지 않은 존재였다고 말하며 다소 싱거운 해피엔딩으로 끝나지만 파이널 컷에서는 유니콘을 접은 종이를 바라보던 ‘데커드’가 엘리베이터에 타고 문이 닫히면서 끝이 난다. 여기서 나오는 가상의 동물 유니콘, ‘데커드’가 상상 속에서 봤던 그 존재는 ‘데커드’가 가지고 있는 희망을 의미할 수도 있다. ‘개프’의 마지막 말처럼 죽지 않는 것은 아무도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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