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갱스 오브 뉴욕> 리뷰
뉴욕이란 도시에 깊은 애정과 관심을 두는 마틴 스콜세지는 뉴욕의 갱들에 대해 오랫동안 다뤄왔다. 그리고 기어코 뉴욕의 잊혀진 역사, 밑바닥 인생들의 이야기를 만들어냈다. 그동안의 영화를 통해 자신의 뿌리에 대해 늘 고민하던 마틴 스콜세지가 자신이 살고 있는 뉴욕의 기반을 만들고 사라져 간 사람들의 이야기를 그려낸 것이다.
“안 돼. 절대로. 피는 칼날에 남아 있어야 해. 언젠가 너도 이해하게 될 거다.”
영화의 오프닝, 신부(리암 니슨)가 면도 후, 일부러 얼굴에 상처를 낸 후 피 묻은 칼날을 아들에게 건네며 이런 말을 한다. 그의 말처럼 19세기의 뉴욕은 칼날의 피가 마를 날이 없던 시대였다. 오프닝의 대결(개인적으로 21세기 영화 중 최고의 오프닝으로 꼽는다.) 후 ‘죽은 토끼’ 갱단의 리더 신부의 아들은 아버지의 복수만을 꿈꾸고 그를 위해 아버지를 죽인 ‘빌’ 더 부처(도살광 빌, 다니엘 데이 루이스)의 밑에서 일한다. 하지만 뜻밖에 ‘빌’에게서 아버지의 품을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들이 없는 ‘빌’에게도 마찬가지다. ‘암스테르담’은 편안한 ‘빌’의 품과 아버지의 복수 사이에서 고민하게 된다.
“망할 경찰엔 돈 안 먹였소?”
“우린 자치(Munipicipal) 경찰에 먹였소. 이건 대도시(Metropolitan” 경찰이란 말이오!”
복수극의 형식을 띄고 있지만 이 영화가 보여주고 싶은 건 19세기 뉴욕의 사회 모습이다. 이 시기는 법이 아니라 주먹이 지배하는 시대다. 인물들은 끝없는 이민자들로 인한 인종갈등과 남북전쟁 등으로 인한 혼란 속에서 변해가는 시대에 놓여있다. 자신들도 이민자인 이들이 토박이(Native)라는 이름을 하고 새로 오는 이민자들을 차별하는 모습은 아이러니컬하다. 부패와 형식뿐인 법으로 가득한 뒷골목에서 '빌'은 주먹으로 질서를 만드는 사람이다. 그의 질서는 피에서 나온다.
“네 이름이 뭐야?”
“암스테르담입니다.”
“암스테르담? 그럼 난 뉴욕이다.”
“암스테르담! 뉴욕이 널 부르잖아!”
“세상은 흔들리고 있었지만 난 아버지의 복수에 사로잡혀 있었다.”
영화는 주먹의 시대에서 법의 시대로 변해가는 과정의 시대를 다룬다. 그 상징은 '암스테르담'과 '빌'이다. 둘은 모두 도시를 만드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했지만 더 이상 쓸모가 없어져 사라져야 할 것들을 상징한다. 그들은 세상이 변해가는 와중에도 그것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뉴욕의 옛 이름 ‘뉴 암스테르담’에서 따왔을 이름처럼 ‘암스테르담’은 오래된 것, 지나간 것(아버지의 복수)에 대한 집착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을 못 보고 있는 인물이다. 그는 16년 전 아버지가 하던 방식대로 면도칼로 얼굴에 흉터를 낸다. 그리고 농담으로 자신을 뉴욕이라고 말하는 ‘빌’은 처음 도시를 구성하던 무법과 혼란상태를 상징한다. 결국 ‘암스테르담’이 낡은 가치인 ‘빌’을 죽이고, 수없이 흐른 사람들의 피와 함께 휩쓸려 간다.
“아버지는 내게 인간은 뼈와 피와 시련을 안고 태어난다 하셨다. 우리의 위대한 도시(뉴욕)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분노의 시대를 관통하며 쓰러져간 우리들에게 그것은 도도한 물살에 씻겨간 소중한 그 무엇과도 같았다. 후세들이 뉴욕을 재건하기 위하여 뭘 했건 우리가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기억하고 있을지는 알 수 없다.”
주먹과 총의 시대가 사라지고 법의 시대로 나아가는 과정, 존 포드의 영화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가 개발 중인 서부의 변혁 시기를 다루었다면 이 영화는 그 도시 버전이라고 할 수 있다.
마틴 스콜세지의 인터뷰에 따르면 제작비 문제로 후반의 드래프트 폭동 장면을 원하는 대로 찍지 못했다고 한다. 제작비의 한계로 완전히 표현이 안 된 것이 아쉬움을 남긴다. 하지만 <갱스 오브 뉴욕>은 스콜세지가 21세기에도 건재하다는 것을 알린 신호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