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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Sep 26. 2018

아픈 사랑과 기억에 대하여 -
<동사서독>

영화 <동사서독>(리덕스) 리뷰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다.”


 왕가위의 대부분의 작품에서 다루는 핵심 주제는 고독과 사랑의 아픔이다. 무협영화의 외피를 입은 이 영화 <동사서독>도 마찬가지다. 영화는 내내 실패한 사랑과 그로 인한 기억의 아픔에 대해서 다루고 있다.

구양봉(장국영)

 사막 한가운데에서 은둔하며 살고 있는 구양봉, 그는 과거 위대한 검객이 되기 위해 사랑하는 여자를 버리고 떠났다. 후에 집에 돌아오니 헤어진 연인은 자신의 형수가 되었다. 그 후 그는 고향을 떠나 냉소적으로 변한 채 살인청부 중개인 역할을 하며 살아간다.

 매년 경칩 즈음에 구양봉을 찾아오는 그의 친구 황약사는 어느 날 그에게 술을 한 병 가지고 온다. 그 술의 이름은 취생몽사, 마시면 지난 과거의 일을 잊게 해준다는 술이라고 황약사는 말한다. 그는 인간이 번뇌가 많은 것은 기억력 때문이라며 술을 마시고 과거의 일을 잊는다. 그러나 구양봉은 취생몽사를 마시지 않는다.

홍칠

 영화는 그에게 찾아오는 다양한 사람들과 그에 얽힌 이야기들을 풀어내는 일종의 옴니버스 형식을 취하고 있다. 두 개의 인격으로 나뉘어진 모용연/모용, 나귀와 달걀만으로 살인청부를 부탁하는 완사녀, 시력을 잃어가는 검객 맹무살수, 맨발의 무사 홍칠 등 다양한 사연을 가진 사람들이 그를 찾아온다.

 그를 찾아오는 사람들은 대개 상처, 특히 사랑에 의한 상처를 받은 이들이다. 모용연/모용언은 사랑에 배신당해 인격이 두 개로 분리됐고, 맹무살수는 자신의 절친한 친구에게 아내를 뺏기고도 눈이 완전히 멀기 전에 그녀를 다시 보고 싶어 한다. 일을 알선해주는 구양봉 또한 사랑에 의해 상처를 받은 건 마찬가지다.

 주목할 만한 인물은 홍칠이다. 그는 단순하고 순진한 검객으로 자신의 신념대로 행동하는 인물이다. 영화에 나오는 이들 중 가장 무언가에 얽매이지 않는 사람인 홍칠은 여러 면에서 구양봉과 정반대에 서 있는 인물이다. 홍칠은 냉소적인 구양봉은 절대 하지 않았을 일-달걀과 나귀만 받고 완사녀의 원수를 갚아주는 일-을 하고 그 과정에서 손가락 하나를 잃는다. 그 행동이 어리석다는 구양봉에게 홍칠은 그를 닮아가기 싫다고 말한다. 검객이 되어 천하를 돌아다니기 위해 사랑을 포기한 구양봉과 달리 홍칠은 아내와 함께 다니겠다며 구양봉의 곁을 떠난다.

(스포일러)

“취생몽사는 그녀가 내게 던진 농담이었다. 잊으려고 노력할수록 더욱 선명하게 기억난다. 그녀는 전에 늘 말했었다. 가질 수 없더라도 잊지는 말자고.”


 구양봉은 자신의 옛 연인, 즉 형수가 몇 년 전에 죽었다는 소식을 듣는다. 그리고 황약사가 가지고 온 취생몽사라는 술은 사실 그녀가 자신에게 준 선물이라는 것을 알게 된다. 구양봉은 그녀가 준 취생몽사를 마시지만 과거를 잊게 해준다는 말과 달리 기억은 더 생생해질 뿐이다. 그는 결국 사막의 집을 불태우고 고향 백타산으로 떠난다.

 왕가위의 영화들이 그렇듯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내용은 아니다. 하지만 영화의 영상미와 영화 내내 풍기는 분위기만으로 이 영화의 가치는 충분하다.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우수에 찬 눈빛을 풍기는 장국영이 있다.


“술과 물의 차이점을 아나? 술은 몸이 달아오르고, 물은 몸이 차가워지지.”


 취생몽사라는 술은 기억, 그리고 사랑의 속성을 잘 표현한 메타포라고 할 수 있다. 잊으려고 하지만 절대 잊혀지지 않고 오히려 더 선명해지는 것(감정), 인간의 번뇌가 기억 때문이라 하지만 따지자면 행복과 고통 모두 기억 때문인 것을. 가장 중요한 것은 영화 속 대사처럼 가질 수 없더라도 잊지는 않는 것이 아닐까. 사랑은 시작하는 것도, 끝내는 것도 결코 사람의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기에. 술 한 잔으로 잊혀지는 것이 기억이고 사랑이라면 순간순간에 최선을 다했던 나의 감정은 어떻게 되는 걸까. 비록 아프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잊어가는 그 과정까지 모두 사랑이라고 믿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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