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권태엽 Feb 09. 2019

쓰다보니 엄청나게 길어진 <웨스트월드> 시즌 1 리뷰

전제 : 다른 거 필요없이 정말 재밌다. 앞으로 이야기할 모든 내용은 이 사실을 전제로 깐 다음에 하는 말이다. 거의 하루만에 에피소드 10개를 다 몰아볼 만큼 재밌고 몰입도가 죽여준다. 재미없었으면 귀찮아서 이런 글 쓰지도 않았을 거다. 소재자체도 기발하고, 중간중간 팝송들을 클래식으로 번안한 음악들이 나오는 것도 깨알 재미다. 제작비 중 캐스팅에 쓴 게 절반은 되지 않을까 싶은 출연진들까지. 안소니 홉킨스랑 에드 해리스가 메인으로 나오는 거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 클레멘타인. 사실 별로 비중이 크진 않다. 그렇다. 외모가 매력적..

1. 생각보다 덜 자극적이다. 뭔 이상한 소리냐 싶겠지만 엄청나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해 그에 상응하는 실제 주어지는 자극은 덜하다. 강간과 살인 등 잔인하고 막장 그 자체인 모습을 더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것. 그런 자극적인 이미지의 전시적 사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 자체를 위해서라도 그게 필요했다. 초반 몇 화동안 세계관을 더 보여주는 게 좋았을 지도. 자유도 극강인 게임에서 퀘스트만 깨는 느낌. 이야기에서 나름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이는 웨스트월드 고인물 끝판왕 ‘맨 인 블랙’(에드 해리스) 뿐인데 그마저도 히든 퀘스트를 깨는 고인물 정도로 보인다.  내가 HBO에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2. 누가 번역한 건지 자막이 개판이다. 특히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전설적인 서부극의 명대사를 인용한 문장(“When the legend becomes fact, print the legend.”)을 ‘전설이 진실이 되면 새 전설을 만들어라’라고 번역한 건 진짜 최악. 늘 생각하지만 번역은 덕력이 가장 중요하다.

3. 믿고 보는 쌍제이, 믿고 거르는 쌍제이의 조합(물론 쌍제이 혼자서 다한 건 절대 아니겠지만). 떡밥을 진짜 오질나게 뿌려댄다. 의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별 의미없는 떡밥들. 역시나 메인 떡밥 중 몇 개는 맥거핀이었고, 끝내 안 밝혀진 것도 많다. 다음 시즌 보라는 거다. 근데 그렇게 뿌려대면 뭐해. 어차피 제대로 회수도 안 할 거면서. 시즌 흘러가면서 흐지부지될 게 뻔한데. 어차피 시즌이 길게 이어지면 제작진, 작가진들이 교체되고 설정도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스리슬쩍 사라지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사실 10화에서 완결된 스토리라고 봐도 될 정도고 딱히 다른 떡밥들이 궁금하지도 않아서 굳이 다음 시즌을 찾아보진 않을 것 같다.

4. 위 사진 속 개노답 민폐 2형제가 나오면 재미가 확 떨어진다. 마치 스타워즈의 자자 뱅크스랑 로즈가 같이 다니는 느낌. 특히 ‘펠릭스’, 얘가 왜 ‘제이브’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돕는지 납득이 안 된다. 거기다가 인물들의 매력도 거의 없어서 이들이 나오는 부분은 긴장감이나 몰입도가 떨어지게 된다. 저 둘이 나오는 부분의 시나리오도 구멍이 좀 많다. 

 웨스트월드 시설도 말단 직원 두 명한테 털릴 만큼 보안이 허술하다. 시설 내의 보안도 드라마 상으로만 보자면 거의 관리 안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아니 거의 모든 곳에 CCTV가 있고 호스트랑 입장객 모두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데 왜 그 모양이지. 그리고 배우 캐스팅이랑 세트 제작에 돈을 다 때려박았는지 최소 지하 82층까지 있는 큰 회사 건물에 사람이 거의 없다. 보안팀도 별로 없다. 이런 안전 불감증 회사는 털려도 된다.

 볼수록 ‘이거 <쥬라기 공원> 인공지능 버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역시나 원작자가 같았다(RIP 마이클 크라이튼). 쥬라기 시리즈를 비롯한 이런 류의 내용에서는 꼭 비슷한 패턴들이 있다. 항상 시설은 최신식인데 보안은 개후지다. 그리고 문제는 꼭 새 버전을 도입할 때 발생한다. 신기술은 검수도 제대로 안하는지 맨날 문제가 되고, 최신 시스템은 고장도 겁나 잘 나는데 안전 불감증이 심각해서 그에 따른 대책도 매번 없다. 꼭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선지자 or 정신나간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피조물들도 생명체라며 존중해줘야 한다며 동조하는 이들도 꼭 있다. 그러다 세계관 전체를 말아먹은 게 <쥬라기 월드2>...

5. 보는 내내 뿌연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과거, 현재, 상상을 혼재시켜 놔서 그걸 밝혀가는 재미가 있긴 한데 결과적으로 뜬구름 잡는 얘기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세계관 설정 자체를 명확히 말 안 해줘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호스트들이 죽으면 리셋되는 주기는 언제인지, 그럴 때 이미 진행 중인 시나리오는 어떻게 영향을 받는 건지 등 웨스트월드에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까 답답하다. 

 앞서 말한 대로 과거, 현재, 상상 등을 혼재시켜 놓고 어떤 것들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계속 현혹시키는데 일부러 안 보여주는 게 아니라 못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연출한 걸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6. 역시 이런 내용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피조물의 창조주(또는 신)에 대한 의심과 반항, AI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문제, 종교적 함의 등이 나온다. 근데 개인적으로 이런 거 이제 지겹다. <블레이드 러너>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하던데 <블레이드 러너>가 나온 지 벌써 40년이 다 돼가고 소설 원작은 50년이 넘었다는 거... 너무 많이 우려먹었고 발전도 거의 없다. 사실 이런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라 더 깊게 들어갈 거리도 별로 없다. 그러니 결국 철학적인 척, 화두를 던지는 척 하다가 아사모사하게 넘어갈 게 뻔할 뻔자(대표적인 예가 <에이리언 커버넌트>). 맨날 인간다움 타령하는데 도대체 인간다운 게 뭔데?

 극 중 대부분의 고객이 남성인 웨스트월드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성녀와 창녀인 것에 나름 의미를 둔 거 같은데 따져보면 ‘메이브’는 몇 십년 동안 배역이 계속 바뀌었으니 그것도 별 의미없어 보인다. 당장 ‘메이브’의 그 전 배역은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였으니.


(스포)


7. 3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시간차의 교차편집은 흡사 <곡성>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그 반전은 참신하고 흥미로웠지만 그걸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그 긴 세월의 교차편집은 편집기술로 보아야 할지, 일종의 사기로 봐야할지 고민이 생긴다. 현혹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 현혹되지 말라는 격인데.

 그리고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흙먼지와 바람을 이겨내고 웨스트월드 시설 내에서 잘 보존돼 있는 사진... 시설 관리 개대충한다는 거...



번외 : 시설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실시간으로 감시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고객들이 사람 죽이고 강간하고 하는 걸 다 볼 수 있다는 건데... 프라이버시 무엇?

 그리고 시나리오를 관리하는 작가가 겨우 한 명...? 작은 사건 하나에도 시나리오 전체에 영향을 받는 저 웨스트월드에서? 물론 이미 오래전에 사전 설정과 세계관은 다 짜져있다고 해도 새로운 스토리 만들고 하면 세세한 인물 설정 같은 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텐데. 당장 크레딧에 등장하는 사람으로만 따져도 이 미드 작가진도 엄청 많구만... 새끼 작가들 엄청 많은데 굳이 필요없어서 안 보여준 걸 거야...

매거진의 이전글 탄탄한 스토리의 힘, 묵직한 메시지 -<암수살인> 리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