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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다보니 엄청나게 길어진 <웨스트월드> 시즌 1 리뷰

by 권태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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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제 : 다른 거 필요없이 정말 재밌다. 앞으로 이야기할 모든 내용은 이 사실을 전제로 깐 다음에 하는 말이다. 거의 하루만에 에피소드 10개를 다 몰아볼 만큼 재밌고 몰입도가 죽여준다. 재미없었으면 귀찮아서 이런 글 쓰지도 않았을 거다. 소재자체도 기발하고, 중간중간 팝송들을 클래식으로 번안한 음악들이 나오는 것도 깨알 재미다. 제작비 중 캐스팅에 쓴 게 절반은 되지 않을까 싶은 출연진들까지. 안소니 홉킨스랑 에드 해리스가 메인으로 나오는 거보고 흠칫 놀랐다.


하지만...

444.jpg 개인적으로 가장 매력적이었던 캐릭터 클레멘타인. 사실 별로 비중이 크진 않다. 그렇다. 외모가 매력적..

1. 생각보다 덜 자극적이다. 뭔 이상한 소리냐 싶겠지만 엄청나게 자극적인 소재에 비해 그에 상응하는 실제 주어지는 자극은 덜하다. 강간과 살인 등 잔인하고 막장 그 자체인 모습을 더 보여줬더라면 좋았을 것. 그런 자극적인 이미지의 전시적 사용을 말하는 게 아니다. 이야기 자체를 위해서라도 그게 필요했다. 초반 몇 화동안 세계관을 더 보여주는 게 좋았을 지도. 자유도 극강인 게임에서 퀘스트만 깨는 느낌. 이야기에서 나름 자신만의 길을 가는 이는 웨스트월드 고인물 끝판왕 ‘맨 인 블랙’(에드 해리스) 뿐인데 그마저도 히든 퀘스트를 깨는 고인물 정도로 보인다. 내가 HBO에 기대한 건 이런 게 아니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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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누가 번역한 건지 자막이 개판이다. 특히 <리버티 밸런스를 쏜 사나이>라는 전설적인 서부극의 명대사를 인용한 문장(“When the legend becomes fact, print the legend.”)을 ‘전설이 진실이 되면 새 전설을 만들어라’라고 번역한 건 진짜 최악. 늘 생각하지만 번역은 덕력이 가장 중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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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믿고 보는 쌍제이, 믿고 거르는 쌍제이의 조합(물론 쌍제이 혼자서 다한 건 절대 아니겠지만). 떡밥을 진짜 오질나게 뿌려댄다. 의미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결국 별 의미없는 떡밥들. 역시나 메인 떡밥 중 몇 개는 맥거핀이었고, 끝내 안 밝혀진 것도 많다. 다음 시즌 보라는 거다. 근데 그렇게 뿌려대면 뭐해. 어차피 제대로 회수도 안 할 거면서. 시즌 흘러가면서 흐지부지될 게 뻔한데. 어차피 시즌이 길게 이어지면 제작진, 작가진들이 교체되고 설정도 바뀌는 경우가 많아서 스리슬쩍 사라지는 것들도 많을 것이다. 사실 10화에서 완결된 스토리라고 봐도 될 정도고 딱히 다른 떡밥들이 궁금하지도 않아서 굳이 다음 시즌을 찾아보진 않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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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위 사진 속 개노답 민폐 2형제가 나오면 재미가 확 떨어진다. 마치 스타워즈의 자자 뱅크스랑 로즈가 같이 다니는 느낌. 특히 ‘펠릭스’, 얘가 왜 ‘제이브’를 그렇게 적극적으로 돕는지 납득이 안 된다. 거기다가 인물들의 매력도 거의 없어서 이들이 나오는 부분은 긴장감이나 몰입도가 떨어지게 된다. 저 둘이 나오는 부분의 시나리오도 구멍이 좀 많다.

웨스트월드 시설도 말단 직원 두 명한테 털릴 만큼 보안이 허술하다. 시설 내의 보안도 드라마 상으로만 보자면 거의 관리 안하는 수준으로 보인다. 아니 거의 모든 곳에 CCTV가 있고 호스트랑 입장객 모두 실시간으로 감시할 수 있는데 왜 그 모양이지. 그리고 배우 캐스팅이랑 세트 제작에 돈을 다 때려박았는지 최소 지하 82층까지 있는 큰 회사 건물에 사람이 거의 없다. 보안팀도 별로 없다. 이런 안전 불감증 회사는 털려도 된다.

볼수록 ‘이거 <쥬라기 공원> 인공지능 버전인가?’라는 생각이 들었는데 알고 보니 역시나 원작자가 같았다(RIP 마이클 크라이튼). 쥬라기 시리즈를 비롯한 이런 류의 내용에서는 꼭 비슷한 패턴들이 있다. 항상 시설은 최신식인데 보안은 개후지다. 그리고 문제는 꼭 새 버전을 도입할 때 발생한다. 신기술은 검수도 제대로 안하는지 맨날 문제가 되고, 최신 시스템은 고장도 겁나 잘 나는데 안전 불감증이 심각해서 그에 따른 대책도 매번 없다. 꼭 남들과 다른 생각을 가진 사람(선지자 or 정신나간 사람)이 문제를 일으키는데 피조물들도 생명체라며 존중해줘야 한다며 동조하는 이들도 꼭 있다. 그러다 세계관 전체를 말아먹은 게 <쥬라기 월드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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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보는 내내 뿌연 안개 속을 헤쳐 나가는 기분이었다. 일부러 과거, 현재, 상상을 혼재시켜 놔서 그걸 밝혀가는 재미가 있긴 한데 결과적으로 뜬구름 잡는 얘기들이 존재한다. 그것은 차치하고서라도 세계관 설정 자체를 명확히 말 안 해줘서 헷갈리는 부분이 있다. 예를 들면 호스트들이 죽으면 리셋되는 주기는 언제인지, 그럴 때 이미 진행 중인 시나리오는 어떻게 영향을 받는 건지 등 웨스트월드에 기본 설정에 대한 설명이 없으니까 답답하다.

앞서 말한 대로 과거, 현재, 상상 등을 혼재시켜 놓고 어떤 것들은 보여주지 않음으로써 관객을 계속 현혹시키는데 일부러 안 보여주는 게 아니라 못 보여주기 때문에 그렇게 연출한 걸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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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역시 이런 내용에서 절대 빠질 수 없는 피조물의 창조주(또는 신)에 대한 의심과 반항, AI에 대한 윤리적•도덕적 문제, 종교적 함의 등이 나온다. 근데 개인적으로 이런 거 이제 지겹다. <블레이드 러너>의 느낌을 내고 싶었다고 하던데 <블레이드 러너>가 나온 지 벌써 40년이 다 돼가고 소설 원작은 50년이 넘었다는 거... 너무 많이 우려먹었고 발전도 거의 없다. 사실 이런 문제는 답이 없는 문제라 더 깊게 들어갈 거리도 별로 없다. 그러니 결국 철학적인 척, 화두를 던지는 척 하다가 아사모사하게 넘어갈 게 뻔할 뻔자(대표적인 예가 <에이리언 커버넌트>). 맨날 인간다움 타령하는데 도대체 인간다운 게 뭔데?

극 중 대부분의 고객이 남성인 웨스트월드에서 깨달음을 얻고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성녀와 창녀인 것에 나름 의미를 둔 거 같은데 따져보면 ‘메이브’는 몇 십년 동안 배역이 계속 바뀌었으니 그것도 별 의미없어 보인다. 당장 ‘메이브’의 그 전 배역은 모성애 가득한 어머니였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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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


7. 30여 년의 세월을 뛰어넘는 시간차의 교차편집은 흡사 <곡성>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안 좋은 의미로... 그 반전은 참신하고 흥미로웠지만 그걸 보여주기 위해 사용한 그 긴 세월의 교차편집은 편집기술로 보아야 할지, 일종의 사기로 봐야할지 고민이 생긴다. 현혹될 수밖에 없도록 만들어놓고 현혹되지 말라는 격인데.

그리고 30년이 넘는 세월동안 흙먼지와 바람을 이겨내고 웨스트월드 시설 내에서 잘 보존돼 있는 사진... 시설 관리 개대충한다는 거...



번외 : 시설의 거의 모든 부분이 실시간으로 감시 가능하다는 것, 그것은 고객들이 사람 죽이고 강간하고 하는 걸 다 볼 수 있다는 건데... 프라이버시 무엇?

그리고 시나리오를 관리하는 작가가 겨우 한 명...? 작은 사건 하나에도 시나리오 전체에 영향을 받는 저 웨스트월드에서? 물론 이미 오래전에 사전 설정과 세계관은 다 짜져있다고 해도 새로운 스토리 만들고 하면 세세한 인물 설정 같은 거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할 텐데. 당장 크레딧에 등장하는 사람으로만 따져도 이 미드 작가진도 엄청 많구만... 새끼 작가들 엄청 많은데 굳이 필요없어서 안 보여준 걸 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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