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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Mar 26. 2019

잘못 만들어진 우상 -영화 <우상> 리뷰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 리뷰

 브런치 무비패스 시사회를 통해 감상한 작품입니다.

 – 2019년 3월 21일 롯데시네마 월드타워점


 솔직히 보면서 적잖이 당황하고 황당했다. 그리고 본인만 그런 감정을 느낀 게 아니라는 걸 분명히 목격했다. 영화 마지막 장면이 끝나고 화면이 블랙아웃될 때, 관객들의 헛웃음 소리를 분명히 들었다. 감독은 뭔가 되새김질할 만한 영화, 되새길수록 더 좋은 영화를 만들고 싶어 했던 것 같은데 나에게는 별로 생각하고 싶지 않은 영화였다.

 영화가 끝난 후 함께 본 지인에게 지금이라도 연변 사투리가 나오는 대사는 자막을 달아야 되지 않겠냐고 진지하게 말했다. 번역을 하는 게 아니라 대사를 적기만 하면 되는 거니까 비용은 들겠지만 얼마 걸리지 않을 것 아니냐고. 원래 한국영화들은 대개 사운드가 아쉬운 편이긴 하다. 하지만 이 영화는 그중에서도 특히 아쉽다. 연변 사투리뿐만 아니라 그냥 한국말 대사도 전달이 잘 안 된다.

 영화는 내내 불친절하다. 내내 내용물을 가리고 껍데기만 살짝살짝 열어주는 기분이었다. 게다가 껍데기를 벗겨내고 드러난 그 내용물도 사실 비닐에 쌓여있다. 맥거핀은 명확히 보여주는데 진짜로 보여줘야 할 게 드러나지 않고 계속 베일에 쌓여있는 느낌, 그게 내가 보면서 계속 느낀 점이다. 또한 주인공들이 개별적으로 움직이면서 알아가는 사실들은 이미 앞서 한 번 언급됐거나 밝혀진 사실들이 대부분이어서 흥미를 유발하지 않았다. 솔직히 영화내용보다 련화를 메인으로 한 내용이 훨씬 더 궁금하고 재밌어 보였다. 물론 그 내용은 나오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가장 큰 문제라고 생각하는 것은 제목과 내용의 불일치성이다. 제목이 <우상>인데 영화를 보면서 ‘우상’이 보이지 않는다.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면서 억지로 끼워 맞추듯 해야 겨우 떠오른다. 개인적으로 영화는 대중에게 공개된 순간 더 이상 감독이나 제작사의 것이 아니라 관객의 것이 된다고 생각하여 관련 인터뷰들을 웬만하면 찾아보지 않는 편이다.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또한 관객 자유니까, 누군가가 ‘사실 이건 이런 의미다’라고 하면서 다른 생각을 막는 걸 원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 영화는 정말 궁금해서 관련 기사를 찾아보게 되었다. 그리고 감독이 ‘우상’이란 단어를 너무 넓은 의미로 사용했다는 생각을 했다. 아니 남용과 오용이 더 알맞을 것 같다.


우상 偶像

1. 나무, 돌, 쇠붙이, 흙 따위로 만든 신불(神佛)이나 사람의 형상.

2. 신처럼 숭배의 대상이 되는 물건이나 사람.

3. 기독교 하나님 이외에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신의 형상.

4. 철학 선입견적인 오견(誤見).

출처 <표준국어대사전>


 (스포일러)

 가령 영화 속 개개인들이 가지고 있는 욕망, 중식의 경우 핏줄과 아들의 자취에 대한 집착, 련화의 경우 한국에 정착하는 것, 명회의 경우 도덕적으로 깨끗해 보이는 정치인이 되는 것, 이런 것에는 ‘우상’이라는 단어보다 ‘갈망’이나 ‘욕망’, 조금 더 그럴듯하게는 ‘이상향’, ‘신세계’라는 단어가 더 어울린다. 굳이 의미를 끼워맞추자면 4번의 의미일 것이다. 그런데 영화 속에 등장하는 명회의 이미지와 중식이 파괴하는 이순신 장군 동상은 각각 2번과 1번, 굳이 한 가지만 꼽으라면 2번의 의미와 가깝다. 즉 의미가 다 다르게 쓰인다는 거다. 그러니 제대로 받아들여질 리가 있나. 물론 명회가 영화에서 우상으로 묘사됐는지나 뜬금없이 갑자기 왜 이순신 장군 동상을, 그것도 굳이 경상남도에서 서울까지 가서 파괴하는지는 여전히 이해가 안 간다. 그리고 이해가 된 것들도 전혀 흥미롭지는 않았다. 영화 자체뿐만 아니라 영화의 이런 점을 오히려 홍보에 사용하는(ex) 당신의 해석은? N차 관람 필수! 등) 영화사의 전략도 실패 그 자체다.

 사설이지만 영화의 마지막 장면을 편집하고 나서 감독은 자아도취에 심취했을 것 같다. 예술이라고. 영화 자체가 자아도취 상태인 듯한 영화에서 마지막 장면은 유독 더 그랬다. 분명 그 장면은 영화 내내 착실히 빌드업돼 엔딩으로 사용했다면 기가 막혔을 거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영화는 그러지 못했고, 그렇기에 뜬금없는 느낌만 들었다. 우습게도 본인의 경우 영화 내내 대사 전달이 잘 안돼서 마지막 그 장면의 개소리(말 그대로)마저 대사인 줄 알고 귀 기울이다가 뒤늦게 깨달았다.

PS. 글을 쓰기 전에 고민이 들었다. ‘어떻게 글을 써야 할까?’, ‘어떻게 포장을 해야 할까?’ 그런 생각을 하는 나 자신이 너무 싫었다. 과거 아트나이너 활동을 할 때 제일 힘들었던 게 너무 싫었던 영화를 내가 맡았다는 이유로 어떻게든 리뷰를 써야 했다는 사실이다. 그러다가 생각이 든 건, 이건 나 혼자 리뷰를 맡은 게 아니라 어차피 영화를 보러 온 모든 이가 써야 되는 리뷰라는 것, 브런치가 영화사랑 ‘제휴’한 거지 이해관계가 직접적인 상관이 없다는 것이었다. 나 말고 이 영화를 온갖 미사여구를 곁들여 칭찬할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 글은 내 마음대로 쓸 것이다. 다만 내가 책임질 수 있는 언어의 범위 안에서. 나는 ‘자기가 싸지른 것에 대한 책임은 자기가 져야 한다’는 그 말을 명심하고 있다. 이 매거진의 이름처럼 이것은 ‘개인적인’ 영화 감상일 뿐이다. 정말 만에 하나 내가 쓰는 영화에 대한 글이 불특정 다수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다면, 그때는 내가 절필을 할지, 철면피를 쓰고 이 길로 들어설지 결정 내려야 할 기로에 서있다는 거겠지. 아마 그때 난 죽고 싶을 거다. ‘예술가가 되지 못한 인간들이 되는 게 평론가다. 군인이 되지 못한 사람이 정보원이 되듯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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