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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권태엽 Apr 27. 2019

사랑과 권력, 그 미묘한 관계 -<더 페이버릿>

영화 <더 페이버릿> 리뷰

 란티모스는 점점 더 주류에 가까워지고 있다. 그의 괴랄한 매력이 줄어든 것은 아쉽지만 그의 영화는 점점 더 정교해지고 있다.

 <더 페이버릿>의 섹슈얼적 측면(+SM)과 사랑의 권력관계에 대해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이런 류의 글을 올리는 사람이 잘 없었다. 그렇기에 내가 써서 올린다. 


 지극히 주관적이다. 당연히 스포가 포함돼있다. 또한 연애와 관계의 측면에서 성별에 대한 구분이 굳이 필요하지 않을 것 같아 크게 남녀를 구분하지 않으려 한다. 


 영화에서 앤을 휘둘리기만 하는 꼭두각시로 보는 사람도 있겠지만 결국 권력을 쥐고 있는 것은 여왕인 앤이다. 그 목적이 권력이건 사랑이건 아님 둘 다이건, 사라와 애비게일이 뭔 짓을 해도 주도권은 앤에게 있을 수밖에 없다. 여왕의 사랑을 받아야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파티 장면에서 사라가 다른 남자와 춤을 추자 앤은 갑자기 사라가 원했던 토지세 인상을 취소한다고 말한다. 앤의 감정에 따라 모든 것은 쉽게 변한다. 

 이상형은 언제나 처음 보는 사람이란 말이 있다. 앤은 사라와의 관계에 애비게일을 더해서 관계의 주도권과 새로운 자극 두 마리의 토끼를 모두 잡는다. 그리고는 교묘히 사라와 애비게일 사이를 줄타기해가며 그들을 애타게 한다. 의도했건 안 했건 말이다.

사라가 후반부에 차고 나온 얼굴의 흉터를 가리는 초커는 정말이지... 최고였다.


 사라와 애비게일은 다른 종류의 사랑(혹은 쾌감)을 앤에게 준다. 굳이 따지자면 사라는 S, 애비게일은 M?

 사라라는 인물을 가장 잘 표현하는 것은 문을 박차고 들어와 앤의 목과 음부를 동시에 움켜잡는 장면이다. 그녀는 직설적이고 단호하며 자존심이 강하다. 언제나 앤에게 감정적으로 솔직하고 사탕발린 말 따윈 하지 않는다. 설령 그로 인해 앤의 마음이 상한다고 해도. 뭐 정치적으로는 앤을 조종하려 하긴 하지만. 사라는 앤을 사랑한다고 앤의 모든 것을 다 사랑하지는 않는다(가령 그녀의 토끼들). 앤의 투정 또한 마찬가지다. 그럴 때마다 그녀는 앤에게 직설을 날린다. 

 하지만 애비게일에 비해, 그녀는 적어도 정말 앤을 사랑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자신이 마신 차에 애비게일이 독을 탄 것을 깨달은 순간, 사라는 곧바로 앤의 방에서 나와 말을 타고 궁궐 밖으로 사라진다. 이 갑작스러운 행동에 대해서 의문이 들었지만 이내 깨달았다. 사라는 항상 강하고 당당한 모습만 앤에게 보였었다. 그녀는 자신의 약한 모습을 사랑하는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 죽을 때가 되면 가족이나 무리를 떠나 홀로 죽음을 맞이하는 짐승들처럼 말이다. 그로 인해 겨우 살아나 피폐해진 상태로 돌아오지만 그녀는 오히려 더 강한 척한다. 앤 앞에서도 마찬가지다. 충분히 동정심을 유발할 수 있었지만 전혀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애비게일이 자신의 차에 독을 탄 것도 말하지 않고 오히려 강도를 물리치느라 그랬다고 거짓말을 한다. 그녀는 불쌍한 자신의 모습, 자기보다 아래라고 생각한 사람에게 당한 자신의 꼴을 절대 앤에게 보이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이것은 자해까지 해서 앤의 동정심을 유발한 애비게일의 행동과 명확한 대비를 이룬다.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앤이 자신의 얼굴의 흉터가 징그럽다고 하자 바로 다음 날 흉터를 가리는 장식을 하고 나타난다.


한 장면 한 장면이 한 폭의 그림 같았던 이 영화에서 애비게일이 의자에 앉아있는 장면(스틸 속 앵글이 아닌 정면에서 바라본 앵글)은 정말 서양화에서 그대로 가져온 것 같았다.


 반면 앤 앞에 새로이 나타난 애비게일, 그녀는 한없이 헌신적이고 부드러운 연인이다. 초반부에 앤의 지병이 도져서 고통받을 때 그녀는 궁에 처음 왔을 때 이야기를 한다. 앤은 궁에 처음 온 날, 누군가의 장난으로 진흙에 꽂혔는데 이건 애비게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 장면은 애비게일이 약초를 따는 모습과 중첩된다. 둘 사이에 공통점이 있다는 것.

 하지만 애비게일은 영화 내내 노골적이다. 아버지의 도박빚 때문에 팔려간 이후 온갖 고생을 겪은 그녀의 목적은 신분상승이자 원래 귀족이었던 자신의 지위 회복이다. 그녀는 자신이 몰락한 귀족이라는 것을 모두에게 언급하고 다니고, 여왕이 지나갈 때 일부러 기침을 해서 자신의 존재감을 알리기도 한다. 애비게일은 사라와는 달리 앤의 투정도 다 들어주고, 슬픔도 함께 공감해주고 울어준다. 그리고 사라는 만지기도 싫어하던 앤의 토끼들과도 잘 어울린다(아, 커닐링구스도 아주 잘해준다). 그리고 일부러 알몸으로 앤의 침대에 누워 잠을 자서 환심을 사려했고, 그것은 성공했다. 

 이때 앤과 애비게일이 한 침대에서 자고 있는 걸 사라가 목격했을 때의 연출은 상당히 인상적이다. 그전까지 영화는 애비게일, 아니 엠마 스톤의 가슴을 보일 듯 말 듯하면서 계속 감춰왔다. 그러다가 사라가 앤의 침실의 문을 열었을 때, 에비 게일의 가슴이 나타난다. 사라, 그리고 관객이 받는 충격의 효과를 극대화하는 연출인 것이다. 

 애비게일은 사라만으로 채울 수 없는 지점을 채워주는 존재다. 앤은 이 정반대 성향의 두 사람 모두를 원하고 사랑한다. 또한 그녀는 언제든 자기가 원하는 자극을 맘대로 취사선택할 수 있는 권력이 있다.


 

사라가 애비게일에게 진 이유는 사라의 말대로 둘의 목적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라가 원하는 것은 앤 그 자체와 동시에 권력이고(and의 개념) 애비게일은 앤보다는 그녀를 통해 가질 수 있는 지위와 권력을 원한다. 사라는 앤이 목적이지만 애비게일에게 앤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다. 그렇기에 사라와 애비게일의 앤에 대한 태도는 다를 수밖에 없다. 애초에 사라가 질 수밖에 없는 싸움이었다.

 궁에서 쫓겨난 후, 사라는 앤에게 계속 편지를 쓰지만 중간에 애비게일이 가로채서 전달되지 못한다. 그리고 모함에 의해 추방명령을 받는다. 자신의 집에 왕의 사자들이 오는 것을 보고 현실을 직감한 사라는 남편에게 영국이 지겨우니 떠나자고 한다. 마치 쫓겨나는 게 아니라 제 의지로 떠나는 것처럼. 사라는 그런 사람이다.



 눈에 가시인 사라가 사라지고 난 애비게일은 점점 더 권력에 맛에 취하고는 급기야 앤의 토끼를 발로 밟아 누른다. 토끼는 애비게일이 앤과 감정적으로 가까워지는 계기이자 앤에게는 자신의 죽은 아이의 대체물이다. 토끼를 애지중지하게 대하며 앤의 환심을 샀던 애비게일은 이제 토끼를 가학적으로 가지고 놀게 되었다. 사라가 떠난 이후 여왕으로서 정치에 힘쓰던 앤은 그 광경을 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토끼를 가학적으로 대하는 것을 본 앤은 그것을 그대로 애비게일에게 돌려주며 권력관계를 되새김해준다. 

  마지막 장면에 대해 다양한 의견이 나온다. 개인적으로 마지막 장면은 근래 본 가장 섹시하고 야한 장면이었다. 주관적인 의견으론 마지막 그 행위는 분명 전형적인 딥쓰롯 플레이였다. 그것도 아주 노골적으로. 앤이 애비게일에게 하는 대사, 무릎을 꿇리고 머리채를 잡은 그 자세와 행동, 앤과 애비게일의 표정까지 말이다. 이 마지막 장면을 단순히 권력 확인으로 볼지, 둘의 SM적인 사랑과 결합해서 볼지는 개인의 자유가 아닐까. 그리고 영화는 란티모스의 영화들이 늘 그렇듯 뭔가 애매하다고 느껴지는 그 지점에서 끝이 난다. 앤과 애비게일의 관계는 어떻게 진행될지, 앤이 또 다른 사라를 길들일지 아니면 새로운 관계가 될지 의문을 남긴 채로. 그리고 난 늘 그랬듯 그 모호한 마무리가 너무 마음에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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