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자는 전 세계 다양한 집단, 심지어 엘리트들에게까지 이 문제를 냈지만 놀랍게도 정답률이 침팬지보다, 그러니까 아무 생각 없이 임의로 찍는 33.3%보다 못하다고 말했다. 부끄럽지만 글을 쓰고 있는 본인도 그랬다. 그리고 내가 주변 사람들에게 직접 테스트를 해본 결과는? 놀라지 마시라. 총 42명이 테스트를 했는데 평균적으로 맞힌 개수가 총 13개 중 2.69개다. 참고로 테스트 대상자의 거의 대부분이 20대 대학생들이었다. 세상에 대해서 오해를 품고 있는 것은 남녀노소를 가리지 않는다.
그중 내가 가장 놀란 건 42명 중 한 명도 맞추지 못한 문제가 2개나 있다는 것이다. 1번 문항 “오늘날 세계 모든 저소득 국가에서 초등학교를 나온 여성은 얼마나 될까?”와 9번 문항 “오늘날 전 세계 1세 아동 중 어떤 질병이든 예방접종을 받은 비율은 몇 퍼센트일까?”이다. 삼지 선다의 문제인데 42명 중 누구도 정답을 맞히지 못했다. 그리고 대부분은 ‘과도하게 극적인 세계관’을 가지고 있었다. 1번 문항의 답으로 20%라고 답한 사람이 70%가 넘었고(정답 60%), 9번 문항도 20%라고 답한 사람이 64.3%가 넘었다(정답 80%). 저소득 국가에 대한 막연한 오해가 아주 강한 것을 알 수 있다. 이밖에도 세계 인구의 다수가 저소득 국가에 살고 있다고 답한 사람이 거의 80%에 달했고, 지난 20년간 세계 인구에서 극빈층 비율이 거의 2배로 늘었다고 답한 사람이 55%가 넘었다.
전에 내가 썼던 서평에서 저자의 의도는 세계에 대한 선진국들(대개 서양)의 편견과 오만함을 깨기 위함이며 그렇기 때문에 절대적인 요소와 도표들을 강조했다고 적었다. 다만 우리나라도 여기서 말하는 선진국에 당연히 포함된다는 것을 간과한 것 같다.
<팩트풀니스>에서는 사람들이 왜 세상을 부정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고 극적으로 생각하는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하고, 어떻게 하면 제대로 된 사실을 받아들일 수 있는지 말해준다. 사람들은 극적인 것에 더 주목하고 열광하는 성향을 가졌고 그것은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나오는 일종의 착시이기에 바꾸기가 매우 힘들다. 그래서 이 책이 가르쳐주는 것은 극적인 것을 차단하거나 하는 방법이 아니라 극적인 것을 흡수하는 걸 조절하는 법이다.
“흔히 현재의 한국사회를 헬조선이라 많이 부른다. 과거의 한국과 현재의 한국을 객관적 지표로 비교해보고, 과거보다 훨씬 발전했음에도 현재의 우리나라 사람들이 '더'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인지 분석해보자.”
처음에 내가 이 책으로 콘텐츠를 만들기로 했을 때, 내가 생각한 건 위의 내용이었다. 하지만 막상 자료조사를 계속할수록 점점 더 내가 원하는 방향과 엇나갔다. 계속 방향을 바꾸고 아무리 조사를 하고 머리를 굴려봐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래서 콘텐츠를 완성하기가 너무 오래 걸렸다.
그래서 이제부터 내가 적을 콘텐츠는 바로
<이런 콘텐츠를 만들려던 나의 기나긴 실패담>
이다.
기본적으로 이 책은 전 세계를 기준으로 하니 모든 걸 그대로 적용할 수는 없다. 당연히 관련 지표는 거의 모든 면에서 현재의 한국이 압도한다. 우리나라는 1960년 이후로 말도 안 되는 속도로 성장을 일궈냈기에 그때와 지금의 한국을 비교하는 건 의미가 없는 셈이다. <팩트풀니스>에서 우리가 오해하고 있던 나라들과도 그 발전이 비교가 전혀 안 된다. <팩트풀니스>의 사례로도 못 쓰일 정도다.
비교를 못 하는 이유는 이밖에도 많다.우리나라의 과거 통계들은 구하기도 매우 힘들고, 있더라도 신뢰성에도 문제가 있다. 당장 90년대 초까지 군사정권의 영향 아래에 있던 나라고, 군사독재기간 동안 얼마나 많은 조작이 일어났는지 아직도 제대로 파악을 못한다. 통계의 신뢰성 또한 떨어질 수밖에.
또한 근현대사에서 극적인 사건과 변화가 수도 없이 많았다. 정치와 관련된 것만 해도 차고 넘칠 수준이다. 책에서 사용하는 말로 표현하자면 우리나라는 실제로 과도하고 극적으로 변해왔다.
결정적으로 내가 위의 주제를 하고자 했을 때, 내가 가장 염두했던 것이 첫째는 절대로 객관적 지표 같은 거 제시해놓고 단순 비교하지 말 것, 둘째는 이미 수없이 나왔던 뻔한 답을 하지 말 것이었다. 여기서 말하는 뻔한 답은 1) 지금이 헬조선이라니 옛날보다 얼마나 좋아졌는데~ 식의 답 2) 말도 안 되는 감성적 위로 3) 지금은 헬조선이 맞고, 그때도 맞다 등이 있다. 하지만 자료조사를 할수록 나의 결론은 “지금을 헬조선이라고 부른다면 우리나라는 최근에 헬조선이 된 것이 아니라 원래부터 헬조선이었다.”로 귀결되었다. 당장 90년대 사건·사고를 찾아봐도 지금 기준으로도 말도 안 되는 일들이 많다. 젊은이들의 불안도 마찬가지인데 90년대 초반 지존파 사건에 대해 다루는 다큐멘터리 <논픽션 다이어리>를 보면 90년대의 젊은이들이 급격한 사회변화로 인해 불안과 혼란을 겪는다는 내용이 나온다. 지금과 매우 비슷하다.
지존파가 언론매체와 인터뷰하는 장면, 좌측의 남자는 "정말 죽이고 싶은 사람을 못 죽여서 한이 맺힙니다."라고 했다. 그게 누구인지 묻자 남자는 이렇게 대답했다 "잘난 놈들."
하지만 좌절하지 말고,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 보았다. 어쨌거나 ‘헬조선’이라는 매우 극화된 단어가 쓰이게 된 건 최근부터다. 정확히 알 순 없지만 2015년 즈음부터 조금씩 쓰이기 시작하던 이 단어는 어느 순간부터 방송·신문 등에서까지 사용하는, 모두에게 통용되는 용어가 되었다. 그전에 쓰이던 사회 용어들은 88만 원 세대, N포 세대 등 특정 세대나 집단을 지칭하던 것들이 많았다. 하지만 이후 급격히 부상한 수저계급론은 아예 사회 전체를 가리키더니 국가 자체를 통칭하는 헬조선이 되었다.
여기서 당연하지만 짚고 넘어가야 할 사항들부터 말하겠다. 단순히 1차원적이고 출처가 불분명한 자료나 예시들로 주변 나라, 그리고 과거의 한국과 비교하며 지나치게 현재를 비하하거나 상황을 왜곡하는 건 <팩트풀니스>에서 말하는 과하게 극적인 세계관이다. 책에서 말하는 것처럼 급작스럽고, 부정적이고, 크고, 공포스러운 소식에 더 주목하고 단편적인 정보들만으로 일반화하고 매도하는 것이다. 지금 당장 우리가 정보를 찾을 수 있는 곳은 훨씬 더 다양해지고 가까워졌지만 우리의 시각은 그대로인 것만 봐도 알 수 있다.
또한 단순히 위의 내용들, 그 단편적인 정보만 가지고 헬조선이란 단어와 단어를 사용하는 사람들 전체를 끌어내리는 이들 또한 <팩트풀니스>의 오류를 그대로 범하는 것이다. 그 양 끝에 있는, 지나치게 극화된 것들을 떼놓고 바라보아야 한다. 아, 당연히 ‘헬조선’이란 단어로 사회 전체를 이해하려는 것 또한 큰 무리가 있다.
‘헬조선’이라는 단어가 모두에게 통용되는 말이 된 건 어떤 식으로든 사람들이 헬조선의 뜻을 인지하고 있다는 것, 그리고 꽤 많은 사람들이 이에 공감한다는 얘기다. 사실 여기에서 객관적인 지표는 큰 의미가 없다. 객관적 지표가 무슨 말을 해도, 주관적으로 어떻게 느끼는지가 개개인에게는 더 중요하다. 이런 자조적이고, 염세적인 단어가 쓰인다는 것은 그만큼 삶에 무기력한 사람들이 많아졌다는 뜻이다. 여기에는 언론과 정치인들이 행하는 단순한 접근이 아니라 근본적인 접근이 필요하다.
그렇다면 여기서 <팩트풀니스>의 내용, 그리고 나의 실패담은 끝이 나는 건가? 아니다. 그럼에도 우리는 계속 살아가고, 더 나아가야 하기에 아직 할 말이 남았다.
우리는 알아가는 것을 멈추면 안 된다. 여기서의 안다는 것은 비판적 사고다. 매우 뻔한 얘기지만 어쩔 수 없다. 명심해야 하는 것은 비판적 사고와 과한 염세주의를 혼동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 무조건 아니라고 하고 시작하는 것이 비판적 사고는 아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우리는 특정한 이(언론, 활동가, 정치인)들이 만드는 극적인 세계관에 갇히지 않도록 해야 한다. 우리나라 언론의 보도행태와 정치인, 활동가들의 행태는 굳이 말하지 않겠다. 말하고 싶은 건 그로 인한 현상이다. 영국 옥스퍼드대 로이터저널리즘연구소의 ‘디지털 뉴스 리포트 2018’에 따르면 한국의 뉴스 신뢰도는 25%로 조사 대상 37개국 중 단연 꼴찌로 전체 응답자의 뉴스 신뢰도인 평균 44%에 훨씬 못 미친다. 언론뿐만이 아니라 우리나라 국민의 정치인 신뢰도 또한 줄곧 낮은 수치를 유지해왔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언론과 정치인을 믿지 못하기에 다른 정보를 찾는데 그렇게 찾은 정보들 또한 신뢰성이 없기는 마찬가지라는 것이다. 악순환의 반복이다. 결국 중요한 건 이러한 뉴스와 각종 수치들을 어떻게 이해하고 받아들이는지 익히는 것이다. 또 비판적 사고를 지겹게 강조할 수밖에. 특히 언론과 정치가 일으키는 그 (막연한) 공포를 제대로 인지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번외)이걸 쓰기 위해 찾은 자료가 엄청 많아서 그냥 넘어가기는 아쉽다. <팩트풀니스>는 통념을 깨는 책이다. 통계청과 기사들을 통해서 본 한국의 통념 체크를 해보자. 참고로 통계는 통계일 뿐이라는 것도 잊지 말기를.
Q. 외환위기 이후로 한국의 자살률이 급증했다?
한국의 자살률은 굳이 설명할 필요가 없다. 2003년부터 10년 넘게 OECD 자살률 1위를 하다가 드디어 작년에 리투아니아(십만 명당 자살률 26.7명)가 OECD에 가입하면서 1위 자리를 내줬다. 하지만 이 두 나라만 유일하게 자살률 25명을 넘기는 국가이고, 3위부터는 18.1명으로 내려간다(OECD의 최신 자료는 아직 2016년까지고 우리나라의 경우 2015년 자료여서 아직 25.8명으로 되어 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언제부터 이렇게 높아졌을까? 흔히 외환위기(1997년) 이후부터라고 많이들 생각한다.
통계청에 따르면 우리나라의 자살률(십만 명당)은 1983년에 8.7명이었다가 꾸준히 증가해 1995년에 10.8명으로 처음으로 10명을 넘어섰다. 그리고 외환위기가 터진 1997년의 사망률은 13.2명이다. 그다지 높지 않은 수치라고? 하지만 기억할 것은 우리나라 정부가 국제 통화기금 IMF에 구제 금융을 신청한 건 1997년 11월 21일이다. 97년 3분기 지점까지 한국 경제가 위기가 아니라는 기사와 인터뷰가 나왔었다. 1998년에 십만 명당 자살률은 18.6명으로 97년에 비해 5.4명이나 급증했다. 외환위기 때 자살률이 높았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99년 자살률은 15.1명으로 다시 줄어들고 2000년에는 13.7명으로 더 낮아진다. 자살률이 단순히 외환위기 때문만은 아니라는 얘기다. 2001년까지 14.6명이었던 자살률은 2002년 18명을 기록하더니 2003년부터 22.7명을 넘어가 급기야 2009년에는 31명까지 오른다. 그리고 2011년 31.7명을 찍고, 점점 내려와 2017년에는 24.3명 정도로 그나마 낮아졌다. 참고로 2008년 후반기부터 세계 금융 위기가 닥쳤다. 또 자살률 20명을 넘긴 2003년은 카드대란으로 신용불량자 수가 급증한 해다. 그리고 그 2003년부터 우리나라의 자살률은 OECD 1위를 기록했다.
결론은 자살률은 단순히 외환위기 전후로 급증한 것이 아니라는 것, 다만 사회적 현상(특히 경제와 관련된 현상)이 자살률에 유의미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이다.
그리고 자료를 찾으면서 우리나라 자살률, 그리고 OECD 자살률에서 정말 눈에 띄는 건 남녀의 자살률 차이다. 우리나라의 남성 자살률은 여성보다 2.5배나 많다. 이뿐만 아니라 OECD 나라 대부분에서 남성의 자살률이 여성의 자살률을 압도한다. 이것에 대한 제대로 된 연구가 필요한 것 같다.
Q. 우리나라 국민의 스트레스 인지율은 계속 높아졌다?
스트레스 인지율은 평소 일상생활 중에 스트레스를 '대단히 많이' 또는 '많이' 느끼는 분율을 뜻한다. 1998년 외환위기 당시 우리나라의 스트레스 인지율은 36.3%로 꽤나 높은 편이었다. 그리고 이후 조금씩 낮아져 20% 후반대를 유지했다. (딱 한 번 25% 이하로 떨어진 적이 있었는데 바로 2013년(23.8%)이다. 다만 그 전해인 2012년에 27%였던 걸 생각하면 이 갑작스러운 감소를 설명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2017년에는 29.1%로 20% 후반대에서 계속 머물러 있다. 다만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이 있다. 1998년의 스트레스 인지율은 연령대별로 고르게(?) 나타났다. 19~29세의 경우는 32.8%로 두 번째로 낮았다. 하지만 2019년 연령대별 차이가 꽤 극명하다. 19~29세의 스트레스 인지율은 무려 37.9%로 가장 높았고 30~39세는 36%, 그리고 이후 나이부터는 20%대로 떨어진다. 현재는 과거에 비해 2~30대의 스트레스 인지율이 크게 증가했다는 것이다.
Q. 여자가 남자보다 책을 많이 읽는다?
우리나라의 연간 독서량은 한 자릿수(9.5권)로 떨어진 상태로 낮다. 여기서 남녀 비율 또한 나타난다. 일반적으로 여자가 남자보다 독서를 많이 한다는 인식이 있다. 하지만 2009년부터 2년 간격으로 이뤄진 조사에 따르면 계속 남자가 여자보다 독서량이 많았다. 많을 땐 3권이나 차이가 났고, 꾸준히 2권 이상의 차이가 난다.
다만 남자의 경우 여자보다 직업과 관련한 서적류를 읽는 비율이 꽤 높았다. 이것이 각종 국가고시 시험들과 관련된 책에 해당하는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여자가 남자보다 독서량이 많은 것은 아니다.
Q. 이혼율은 계속 증가해왔다?
유교적 가치관이 남아있다는 우리나라가 정작 이혼율이 높은 나라라는 아이러니는 꽤 오래됐다. 조이혼율(천명당 이혼건수)을 살펴보면 1995년에 1.5건이었던 것이 1997년에 2를 찍더니 다음 해에 바로 2.5건으로 상승하다 2003년에는 무려 천명당 3.4건에 이르렀다(위에 언급했듯 2003년은 신용카드 대란이 있던 해다). 하지만 그 후로는 다시 2 건대로 내려와서 조금씩 유지·하락을 하다 2018년은 천 명당 2.1건 정도다. 1998년 이후 가장 낮은 수준이다. 물론 여전히 OECD 국가 중 아시아 중에서는 가장 높은 축에 속한다. 아 참고로 조 혼인율(천명당 결혼건수) 1995년 8.7건에서 2018년 5건으로 혼인건수와 비율 모두 폭락했다.
그리고 한 가지 더, 우리나라가 이혼율 세계 1위라고 했던 건 통계자료의 오류다. 어렸을 땐 나도 우리나라 이혼율이 세계 1등인 줄만 알았다. 2002년 국내 이혼율이 47.4%를 기록했다는 통계자료가 발표됐는데 이 수치대로라면 국내 부부 두 쌍 중 한 쌍이 이혼을 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이는 곧 통계 오류로 2002년도에 이혼한 부부의 수를 동일한 연도에 결혼한 부부의 수로 단순히 나눈 수치였다.
이밖에 수많은 자료와 논문, 통계 그리고 OECD, IMF, UN 등 우리나라 말을 지원 안 해주는 다양한 사이트들까지 뒤졌지만 그중 대부분이 버려졌다... 덕분에 뜻하지 않게 온갖 통계와 자료들을 공부했다. 근현대사에 있었던 중요 범죄들과 사건·사고들까지 다시 한번 학습하는 시간이 되었다. 뜻하지 않았지만 유용한 지식들이 늘어났다.